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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지 않았다. 김규식 선생이 만주로 건너간 이후 그의 행적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때는 1919년 북로군 정서에서의 활동이다.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전멸시킨 북로군정서의 주역 1919년 3.1 운동의 영향을 받은 만주지역의 독립항쟁단체 들은 독립전쟁을 적극 준비하기 시작했다. 동부 만주 지역 의 한인사회에 여러 무장단체가 출현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 가 1919년 8월 정의단에서 명칭을 변경한 군정회다. 군정회 는 이후 대한군정서로 다시 이름을 바꿨는데 남부 만주 지방 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와 구분하기 위해 대한북로군정서 라고 불렀다. 김규식 선생은 북로군정서에서 중대장으로 근 무하면서 사관연성소의 교관으로 활동했다. 연성소는 1920 년 9월, 289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생의 대다 수는 교성대로 편성되어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이동하던 중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만나 접전을 벌였고 선 생은 제2연대 제1대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전했다. 청산리전투 이후 일제는 만주 지역 한인기지촌의 민간인을 무차별 공격하였고, 독립군의 대부분은 일제의 공격을 피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기 위해 연해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활동하던 부대와 통합하며 사할린의용군이 만들어지는데 선생은 참모부원으로 임명된다. 하지만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다시 만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군사 활동 중심에서 자치 활동 중심으로 김규식 선생은 1922년 말, 목릉현 마교하에서 김좌진 이범석 등과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 지방관헌에게 무장 해제를 당해 영안현 영고탑에서 재기를 모색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주민들의 반발과 중국 지방관헌에 의해 다시 흩어질 수밖에 없어 선생은 동만주지역으로 활동거점을 옮겼다. 1923년 5월 연길에서 고려혁명군이 조직될 때 총사령으로 활동하면서 경제활동과 군사활동을 동 시에 하는 둔경제를 실살해 조선인 사회에 부담을 더는 동시에 장기적인 항일투쟁 운동기반을 마련 해 나갔다. 만주 독립항쟁의 주류가 무장투쟁에서 자치적 독립항쟁으로 넘어가던 과도기 때였다. 고려혁명군은 대한군정서가 조직되자 흡수됐으며 김규식 선생은 대한군정서의 총사령에 선출됐 다. 1925년 3월 대한군정서를 중심으로 신민부를 결성했다. 신민부를 비롯한 정의부와 참의부는 독 북로군정서의 독립군들이 사용했던 태극기(위)와 장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