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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단, 통의부, 노동친목회 등의 대표들과 함께 독립군 조직의 통합을 논의했다. 이 회의는 김동삼 선생 을 의장으로 선출한 후 협의를 거듭한 끝에 정의부를 결성했다. 고문과 옥고로 큰 별이 지다. 8월에는 부하 10여 명을 거느리고 전가전(傳家甸)으로 가서 군자금 4~5백 원을 모집하고 하얼빈으 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독립항쟁단체 의 대표들과 만나 통일회를 조직할 계 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탐지 한 일경이 비상소집되어 하얼빈에서 포위를 당했고 장시간의 총격전 끝에 마침내 일본 경찰에게 잡히고 말았다. 1924년 8월 22일 신의주로 압송된 의사는 1925년 3월 30일 고등법원에 서 징역 7년형이 확정되었는데 판결 이 있은 후 의사는 크게 웃으며 의연 하게 돌아서 재판장을 떠나 사람들이 의사의 호기를 놀라워했다. 그 후 2년 이상을 신의주 감옥에서 고문과 옥고로 시달린 의사가 피골이 상접해 죽기 직전인 상태가 되자 일 제 법원은 1926년 9월 28일 병보석으로 선천 미동병원에 입원하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장기간의 입원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골병에 이른 몸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 았다. 가족과 친지들은 의료시설이 갖춰진 일본인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했으나 “죽어도 왜놈에게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했다. 1928년 1월 16일 마침내 “나 죽거든 유골을 만주땅에 묻어 줄 것이요, 나라를 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일생을 마감했다. 편강렬 선생 판결문(상)과 투병중인 편강렬 선생(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