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page

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09 의성단 조직, 만주벌 항일무장투쟁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거족적인 독 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편강렬 의사는 동료들과 함께 이 지방의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심한 감 시 때문에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못하였고 3월 15일 이후에야 여러 곳에 서 산발적인 시위를 할 수 있었다. 3.1 독립운동이후 의사는 동생인 편덕렬을 상해의 임시정부에 파견했고, 같은 해 가을에는 안악에 서 최명식, 간병제 등과 군사주비단을 조직해 안악군 대표를 맡았다. 군사주비단 ‘군립군의 국내 진 입 시 원조를 목표’로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어느 매국노의 밀고로 이 사실이 일경에게 알려지게 된다. 황해도 경찰부에서 는 각 군에 비상경계망을 펴고 체포해 1919년 9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개월의 형을 받고 다 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쇠약한 몸으로 출옥한 의사는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가족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뿔뿔이 흩어 졌고 점포는 채권자에게 탈취당한 뒤인지라 미련 없이 중국으로 떠났다. 북경과 상해에서 옛 동료들 과 조국광복의 방법을 논의한 끝에 무장항쟁이 최선의 수단이라고 판단하고 만주에 정착했다. 의성단을 조직해 창춘성 내 일본 영사관 습격 그 후 1923년 10월경 산해관에서 강진지, 양기탁, 남정 등과 의성단을 조직한 의사는 단장에 추대 됐다. 1924년 의사는 단원들과 함께 창춘성내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 7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적 60 여 명을 살상하는 큰 성과를 거뒀으며 대낮에 봉천(현재의 심양) 시내 만철병원을 습격해 다수의 적 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총독부는 크게 당황해 만주에 있던 경찰력과 밀정들을 총동원하고 총독부 사무관이던 홍모(洪某) 를 특파하여 의사를 체포코자 했으나 의사는 장춘 시내에 ‘아사홍생 아생홍사(我死洪生 我生洪死 : 홍가와 나와 죽기 아니면 살기 내기다)’라는 야유 섞인 벽보를 붙였다. 1924년 의사는 만주지역에 독립항쟁단체들이 수없이 난립하여 그 실행방법과 활동방법이 달라 일 반 동포들이 오히려 많은 곤란을 겪게될 뿐 아니라 독립항쟁전선에 약화를 가져온다 생각하고 통합 운동을 추진했다. 1924년 7월 길림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의를 개최해 서로군정서, 길림주민회, 광정단, 대한독립 의성단과 편강렬 선생의 활동 보도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