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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 민영백 ‘(주)민설계’ 회장(신규식선생기념사업회 이사) 21 결주의’제창에 호응하여 국내 민 중의 시위운동을 전개하려고 하 는 비밀계획의 연락사무를 보좌 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 었습니다. 특히 1919년 11월에 박달학원 등의 인연과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등의 이유로 임시정 부 법무총장을 맡고있던 신규식 선생의 비서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규식 선생은 1911년 말 중국 상해로 망명했지만, 가 족은 고향 청주에 남겨두고 혼자 온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 부가 세워지고, 신규식 선생이 요직을 맡게 되면서 1919년 9월 고향에 있던 부인과 딸 신창희(일명 신 명호)를 상해로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아버님과 모 친(신창희 여사)이 만나게 되었죠” 신규식은 거의 망명 10년만에 부인 조정완 여사 와 딸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민필호가 보기에 신창 희가 나이는 어렸지만 ‘천하의 미인’으로 보였다고 한다. 이 무렵 민필호와 신규식의 인연은 독립운동 을 계기로 더욱 깊어졌고, 결국 민필호와 신창희는 1920년 5월 상해에서 결혼하게 된다. 당시 민필호가 우리 나이로 23세, 신창희가 17세였다. 이후 이 부부 는 2남(영수 · 영백) 4녀(영주 · 영애 · 영의 · 영화)를 낳으 면서 나란히 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두사람의 나이차는 여섯 살이었다(기록상으로는 8세 차이지 만, 민회장은 실제는 6세 차이라고 했다). 이후 민필 호는 상해 전신국(電信局)에서 근무하면서 신규식의 비서로 일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일도 겸했다. 그는 특히 임시정부 국무총리겸 외무총장 신규 식의 수행비서로 1921년 10월 중국혁명의 영수 쑨원(孫 文)이 이끄는 중국 호법(護法)정부를 예방하여 사실 상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는 큰 업적을 남기게 되었 다. 당시 호법정부는 중국 남방 광동성(廣東省)의 광 저우(廣州)에 소재하고 있어 상해와 거리가 매우 멀 었다.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장인과 사위가 합작하 여 이룬 큰 성과였다. 신규식 전기 간행의 의의 민회장의 부친은 저서로 『한중외교사화(韓中外交 史話)』를 남겼고, 외조부인 신규식 선생의 『한국혼 (韓國魂)』을 중국어로 번역해 펴내기도 했다. 또 흥 미롭게도 중국인학자 석원화(石源華) 교수(상해 復旦 大)가 부친과 외조부의 활동을 함께 다룬 연구서『신 규식·민필호와 한중관계』(나남출판사, 2003)를 출판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장석흥 국민대 명예교수가 『신규 2009년 1월 호주(오스트레일리아) 방송과 인터뷰중인 민영백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