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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황해도에서 장규섭, 우병열, 이진룡 의병장 등이 의병을 이끌었고, 평안도에서는 전덕원 의병 장 등이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을사의병 항쟁은 을미의병 항쟁보다 참가하고자 하는 의미는 컸으나 대중의 지지가 저조하고 광무 농민운동이 혼재되어 다소 미약하였다. 주로 중부 지방 중심으로 전투 경험이 부족한 평민이 의병의 대다수를 차지한 까닭에 지형을 이용한 유격전과 기습 작전으로 의병 항쟁을 펼쳤다. 이 시기의 의병 항쟁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후일 정미의병을 일으키는 기반이 되었다. 갑작스런 황제 퇴위와 군대해산 | 정미의병(후기)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의병 항쟁과 계몽 운동 등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은 지속되었지만, 일 제의 내정간섭은 더욱 강화되었다. 고종황제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 하고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호 소하기 위하여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 리원 검사 이준, 전 주러 공사관 참서관 이위 종 등 3명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을사늑약이 황제의 뜻이 아닌 일제의 협박과 강제에 의한 것이므로 마땅히 조약을 무효화해야한다고 호소하는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일제는 고종을 감금하다시피 하면서 3명의 특사가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교묘하게 방해하였다. 이에 이준 열사는 그 곳에서 울분 이 쌓여 순국하였고, 다른 두 명은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을 위하여 호소한다”는 제목의 연설을 하여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였음에도 대세를 돌이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언론을 통해 일제의 침략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데 성공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보복 조치로 고종황제를 퇴위시킬 음모를 꾸몄다. 고종황제는 헤이그 특사 사 건의 책임을 추궁하며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에 못 이겨 황 제의 자리를 결국 순종에게 넘긴다. 이에 친일각료들은 황제가 양위하였다고 허위로 발표하였다. 일제의 병탄 작업은 서둘러 진행되었다.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모든 권력을 빼앗고, ‘신문지법’을 공포하여 언론을 탄압하였고, ‘보안법’을 공포하여 집회와 결사를 금지시켰다.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 이 상설, 이위종(왼쪽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