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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 대통령장│편강렬(片康烈) “양양한 압록강수는 밤낮으로 흘러가는 곳 어디메뇨 유유한 나의심사 너를 따라 거지 없다” 젊을 때 의병에 투 신한 편강렬 선생은 평생을 항일 운동에 매진하다 결국 일제에 잡혔고 고문으로 생긴 병마에 시달리며 죽음 에 직면하고도 독립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잃지 않았다. 약관의 나이에 의병활동, 서울 진공작전 참가 편강렬 의사는 1892년 2월 28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 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전국 각지에서는 토왜복수를 외치며 의병이 일어났다. 1907년 의사 는 연고지인 경상도 지방에서 일어난 이강년 의병진의 소집장 겸 선봉장으로 참전해 경상·충청도 일대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 1908년에 전국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고 서울 진공작전을 결 행하게 되자 의사는 군사장 허위의 휘하에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여 싸웠으나 부상을 입 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평양의 숭실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910년 한일병합이 강제 체결되자 다시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한 의사는 황해도 지회에서 은밀한 활동을 벌 인다. 그때 일제가 날조한 ‘사내(寺內)총독암살모의사건’에 연루되어 무죄 석방을 받을 때까지 2년여 동안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 영남일대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광복회에 가입 해 항일활동을 벌였다. 나 죽거든 나라 찾기 전에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 의병으로 항일활동을 시작하여 의성단을 조직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 을 진행했다. ● 1892년 2월 28일 황해도 연백 출생 ● 1907년 이강년의병진의 소집장 겸 선봉장으로 참전 ● 1919년 황해도에서 군사주비단을 조직 ● 1923년 의성단 단장으로 의열투쟁 전개 ● 1928년 1월 16일 신의주 감옥에서 옥사,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핵심공적 주요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