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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일제는 보복으로 읍내의 교회를 불태우는 등 강력한 탄압을 시행해 많은 사람이 산속으로 피신하거 나 만주로 망명했고 선생 형제도 고향을 떠나 만주로 이주했다. 만주 망명과 1920년대 초 독립항쟁 일본 경찰의 정보문서에 따르면 1919년 4월 3일 남만주 집안현 서취보 화전자에 거주하는 예수교 도 최석준, 이상근 외 6명의 한인이 한족회를 조직하고 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볼 때 3월 말에서 4월 초에 집안현으로 망명하여 독립항쟁에 투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우 최석준은 남만주의 독립항쟁단체인 광복군총영에 가입하여 크게 활약했다. 하지만 상해 임 시정부에 다녀오다가 일경에게 잡혔으며 동료가 고문당하는 것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이호영과 함께 일경이 쏜 총을 맞고 사망하고 말았다. 최석순 선생은 친지들을 통해 동생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때문에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더 욱 강해졌다. 남만주 지역에서는 대규모 독립항쟁조직인 대한독립단이 조직되자 선생은 대한독립단 에 적극 참가하여 집서지 단장으로 집안현 서부지역의 민족운동을 총괄하게 됐다. 1922년 1월경 한족회, 독립단, 광한단, 대한교민단, 청년단연합회, 광복군총영 등 대표들이 환인현 에 모여 대한통군부를 결성하였다. 같은 해 8월 다른 독립단체와 다시 통합을 시도해 대한통의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선생은 통의부 산하 독립군인 의용군 제2중대장을 맡았다. 통의부와 참의부 의용군 중대장으로 큰 활약 대한통의부는 금주, 금연, 혼인 시 재산을 논하는 것, 헛된 제사 등을 금지하는 규정을 발포하여 어려운 처지에서 생활하는 한인동포 들의 생활을 개선하려 했으며 계몽 사업을 구 상하고 추진하려고 했다. 하지만 통의부는 공 화파와 복벽파의 대립으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선생이 거느린 통의부 제2중대는 대 한독립단 계열의 인사들이 주로 참여한 조직이었지만 중대별로 구성원이나 이념이 약간씩 다른 연 합부대의 성격을 띠었다. 결국, 벽복 이념을 가진 전덕원 등의 인사가 통의부에서 분리해 의군부를 세우는 등 대한통의부는 내분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독립군 지도자들은 임시정부의 직할부대로 만주의 독립군을 통합할 필요성을 느끼고 임시정부의 요인과 만나 육군주만참의부를 만들었다. 대한통의부 발족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