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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03 만주 각지에 분산된 독립군 통합을 위한 노력 1922년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대한독립단, 벽창의용대, 광복군총영, 광 한단, 보합단 등 각 군단의 대표들이 압록강 인근 인 관전현(寬甸縣, 단둥시 인근)에 모여 남만통일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를 거듭하여 1922년 2월에 대한통군부가 조 직되고 채상덕 선생은 최고 책임자인 총장에 취임 했다. 하지만 대한통군부에 참여하지 못한 독립항 쟁단체들이 많아 그해 여름에 다시 통합운동이 전 개된다. 1922년 8월에 남만한족통일회가 개최됐 다. 이 회의에서 6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통 군부는 정부조직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며 대 한통의부로 이름을 바꿨다. 선생은 여기서 부총장 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통의부는 간부 간의 순조 로운 발전을 보이지 못하고 시작 초기부터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분열의 발단은 국내에서 온 양기 탁, 전덕원과의 인사와 조직 등의 문제에 따른 의 견 대립으로 생긴 불화에서 비롯됐다. 복벽주의 단체인 의군부에 참여 이 일은 단순히 두 사람 간의 개인적인 문제나 인선, 조직 등의 표면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1920년 이래로 계속되어 온 공화적 민주주의 계열과 복벽적 민족주의 계열의 이념투쟁이 밑바탕에 깔려있 었다. 공화제를 주창해 민주정부를 수립하려는 신파와 조선왕조를 복구해 대한제국을 부활시키려는 구 파의 대립이었던 것이다. 연호를 뭘 쓰느냐 하는 문제로 대립했다는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전덕원은 참모부 감독에 선임되었으나 공화주의적 정치노선에 반대하여 취임을 거부했다. 그런 가운데 제5중대장 김명봉과 부대장 조태빈이 통의부를 불신한다는 혐의로 피살되고 제5중대의 무기 가 타중대에 의하여 강제로 압수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덕원은 1923년 2월 왕조 재건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항일군단인 의군부를 조 대한통의부의 활동지 환인현 훈강의 전경 1922년 2월 한족회, 서로군정서, 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결성된 대 한통군부 대원의 훈련 모습. 선생은 여기서 총장에 취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