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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01 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 천에다 “조선 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해 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인식시키면서 일본인들에게 속지 말도록 호소했다. “독립은 정신에 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 1933년 초, 남자현 여사는 이춘기 등과 소위 만주국 건국일인 3월 1일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주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武 藤信義)를 제거하기로 하고 동년 2월 29일 거지로 변장,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몸에 숨기고 하얼빈에서 장춘으로 가기 위해 떠났 다. 그러나 하얼빈 교외 정양가를 지나던 중, 미행하던 일본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여사는 동년 8월 마침내 죽기로 결심하고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 식투쟁을 벌이자 6개월간의 고문과 옥중 생활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 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경은 보석으로 석방했다. 여사는 적십자병 원에 입원하였다가 다시 하얼빈에 있는 조 모 씨의 여관으로 옮겼으 나 임종이 다가오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여사는 아들 김영달에게 중국 화폐 2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 가 독립되면 독립축하금으로 이 돈을 희사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 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1933년 8 월 22일 향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남자현 여사의 유언에 따라 유 족들은 1946년 3월 1일 서울운동 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에서 김구, 이승만 선생에게 독립축하 금을 전달했다. 남자현 지사의 단식으로 순국한 내용을 다 룬 보도기사(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26일) 경상북도 영양군에 위치하고 있는 남자현 지사 의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