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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어 누에를 키우며 손수 만든 명주를 팔아 가게를 이 어나갔다. 여사의 나이 46세가 되던 1919년, 3.1 운 동이 일어났고 남자현 여사는 이를 지켜보며 일제 와 싸우는 것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닫 는다. 그해 3월 9일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에 도착해 서로군정서 독립군 군사들 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다.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주살하려 하였으나 실패 남자현 여사는 북만주 일대의 농촌을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건립했으며, 여성계몽에도 힘써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권신장과 자질향상에 주력하였다. 망명생활 6년을 맞은 1925년,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주살하기 위해 채찬 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 거사를 추진했으나 삼엄한 경계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본거지로 되돌아가야 했 다. 돌아가던 도중 의성단장 편강렬, 양기탁 등이 각 독립항쟁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고 독립항쟁단체들을 찾아다니며 통합을 독려했다. 1927년 봄 상해 임시정부요인인 안창호 선생이 길림에 있는 조양문 밖에서 정의부 중앙간부와 각 운동단체 간부와 지방유지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석주 의사 추도회 겸 민족장래에 대한 강연 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이에 일제는 중국 헌병사령관을 협박하여 안창호, 김동삼 선생 등 3백 명 을 체포하게 하고 주요 간부급 50인의 신병을 인도하도록 했다. 당시 여사는 투옥 중인 안창호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석방될 때까지 정성껏 옥바라지를 했다. 중국 정부는 우리 측의 항의에 따라 일본의 요구를 무시하고 체포한 인사들을 보석으로 석방했다. 국제연맹조사단에 혈서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 1931년 9월 일제는 소위 만주사변을 일으켜 요녕성뿐만 아니라 길림성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치자 김동삼 선생은 길림성을 떠나 하얼빈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정인호의 집에 묵고 있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 아무도 김동삼 선생과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여사는 그의 친척으로 위장, 면회를 허가받고 연락책 역할을 했다. 김동삼 선생의 지시내용을 동지들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그가 국내에 호송될 때 구출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웠으나 동지들의 행동지연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단장 리틀경)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 남자현 여사의 가족사진(앞줄 왼쪽에서 두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