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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024년 12월 순국 특별 초대석  만나고 싶었습니다 민영백 ‘(주)민설계’ 회장(신규식선생기념사업회 이사) 고, 오늘의 관점에서 정말 가치있는 것이라면 의미 가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딴 생각을 하지 않고, 평생 건축설계 사업에 열중해 왔습니다.” 듣고보니 민회장 집안같은 명문가에서 남을 의식 하지 않고, 자식이 원하는대로 믿어주고 마음껏 소 신을 펴게해주는 교육방식이 참으로 훌륭한 것이 아 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여흥 민씨 삼방파는 조선의 19대 왕인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 26대 고 종의 왕비 명성황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27대)의 비인 순명효황후 등 3명의 왕비(황후)를 배출했고, 문과 급제자 70여 명, 영의정 등 재상급 상신 7명, 당상관(종이품, 정삼품 이상) 80여 명을 배출한 문벌집안이다. 물론 조선 말기 척족(戚族) 세도집안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민회장의 부친 민필호 선생은 명성황후와는 12촌 사이라고 한다. 하지만 민회장은 이런 집안 얘기를 일체 하지 말라 고 당부했다. 부친 민필호와 외조부 신규식의 인연 민회장으로부터 듣고싶은 집안의 독립운동 이야 기가 무척 많았지만, 시간의 제약으로 먼저 부친과 외조부에 얽힌 이야기를 먼저 들어 보았다. 특히 부 친과 모친 신창희 여사의 결혼 등 가정에 얽힌 비사 가 궁금하기도 했다. “아버님은 11세 때에 큰형 민준호(1877~1937) 가 경영하는 경신소학교 5학년 2학기에 편입했습니 다. 반년 후 소학교를 졸업하고, 1908년 휘문의숙(현 재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했지요 그런데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되었습니다. 1911년 4학년 때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외국(일본) 연호가 적힌 졸 업장을 받는 것이 수치스럽다.”며 휘문의숙을 그 만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11년 11월 중국 상해(上 海)로 망명하셨습니다(그가 휘문의숙을 졸업했다는 기록도 있다). 상해에서는 신규식 선생이 운영하는 박달학원(博達學院)에 다녔습니다. 주로 중국어, 영 어, 역사를 공부했다고 합니다. 1912년 2월 학생 신 분으로 동제사(同濟社), 그 뒤 확대 조직한 신아동제 사(新亞同濟社)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 었습니다. 1912년 7월 박달학원을 졸업하고 그 해 9 월에는 중국의 남양학당(南洋學堂)에 입학하여 1917 년 7월 졸업하셨죠. 그래서 아버님은 영어와 중국어 에 능통하셨는데, 이것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에 큰 힘이되었습니다.” 당시 박달학원에는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 명 망있는 인물들이 교수요원으로 재직하고 있어 우수 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박달학원에서 민필 호는 윤보선 · 신성모 · 이범석 등을 만나 매우 가까운 사이로 친하게 지냈으며, 상해의 한 숙소에서 동거 했다고 한다. 특히 이범석과는 형제처럼 가까운 절 친이었다고 한다. 민필호는 남양학당을 졸업한 뒤 1917년 9월 중국 교통부에서 세운 상해체신학교(上 海遞信學校)에 입학하여 이듬해 12월에 졸업했는데, 이 경력이 민필호의 생애와 한국 독립운동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1918 년 12월부터 1937년 11월까지 중국정부 교통국 전 보국(상해 · 杭州 · 南京)에 근무하면서, 대한민국임시 정부 등의 독립운동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민회장의 답변이 계속되었다. “아버님은 1918년 말에 동제사 이사장으로 있던 신규식 선생의 지시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