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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6월30일 일요일 2 (제210호) 제 의 1.궤포의(掛脯儀)- 제향일(祭享日)을앞두고제향15일에서3 0일 택일(擇日)하여 종회장(宗會長) 이하(以下) 소임(所任-有 司등)이전원참석(全員參席)하여준비사항점검하고연청문(延 請文-초대의글)작성및발송(享禮日통지) 2.천망(薦望,제관을추천하는일)-연청문(延請文-초대의글) 을보내고오집사(초헌관,아헌관,종헌관,집례,축)를천하여망 첩(望帖)을발송하여대비케한다.그리고이는반드시사전에본 인승낙을받아우편또는기타방법으로전한다. 3. 시도기- 시도기(時到記)는 참제원의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후일제관분정에이용하기도한다. 4.제집사의 분정(分定) ; ①집사분정을 위한 개좌는 입제일(入 祭日)저녁또는제향일(祭享日)아침에종회장(宗會長)이하모 든 참제원이 모인자리에서 유사가 “개좌(開座)아뢰오.”를 세 번 연창하고상읍(相揖),평신(平身)후시작한다. ②3조5공(三曹五公)의선출△조사(曹司)선출-참제원의추 천을 받아 서원의 서기격인 ‘조사’ 3인을 선출(종회장이 추천 하 고참제원의동의를받기도한다) △공사원(公事員)5인선출:조사가협의하여선출한다.인사 를다루는공사원은대개원임(院任)의유사가운데모든사람들 이 추복(推服:추앙하여 복종함)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데,일종의 원로원회의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조사·공사원은 반 드시홀수로선출한다.) △제집사(諸執事)선정:조사,공사원이재임실(齋任室)에별 도로모여숙의끝에5집사및제집사(諸執事)를추대(推戴)한다. 5집사는 회의 시간 단축을 위하여 종회장 이하 소임이 참석하여 사전에협의하기도한다. △직일(直日):기록을 맡은 집사로 분정은 하지 않음)의 선정 : 직일이정해지면“直日000”라고쓴후기둥에붙인다. △ 집사정기(執事定記 또는 執事定榜記)는 축(祝)이 정서(精 書)하여게시(揭示)하고예(禮)가창방(唱榜)한다. △유사가상읍(相揖)후“파좌(罷座)아뢰오.”를 세 번 연창하 고회의를마친다. 5.사축 - 제집사(諸執事)의 분정(分定)이 끝나면 축(祝)이 사 당안에 들어가 사축(寫祝),축이 사축 불가시 직일(直日)이 사축 (寫祝)하고원장에서보인다.(사축은주로당일새벽에한다.) 6. 제찬(祭饌)간검(看儉) - 유사(有司)와 장찬(掌饌)이 전사청 (典祀廳)에서제기(祭器)와 제수(祭需)의정결(精潔)을미리 간 검(看儉)한다. 7.제물봉진과진설;정해진순서에따라제물을봉진하고장찬 (掌饌)과 진설(陳設)은 예복(禮服)으로 전사청(典祀廳)의 제수 (祭需)를봉송(奉送)하고초헌관의수결을받는다. 진설은4변4두를놓은다.좌4변은녹포,어숙(건대구)백자(잦 또는 밤) 우4두는 녹해(쇠고기), 어해(조기), 구저(미나리 또는 부추),청저(무우)를 놓고앞줄 가운데좌측 보에는 불린쌀,우측 궤에는 불린 기장을, 그리고 정 중앙에 시생(돼지고기 또는 머 리),맨앞줄에는작(爵)을놓은데술을따르지않을때는돌려놓 고,술을 따른 후에는 다리 하나가 헌관에게 향하도록 하고,산뢰 (술항아리)와작(酌)은준소에가지런히놓는다. 8.행사준비-집사정기(執事定記)는향례하는장소앞에게시 (揭示)하고, 제집사(諸執事)는 행사에 필요한 제반사항(諸般事 項)을준비및확인하여행사에차질이없도록한다. 9.제참제원에게원규를공지한다. △승자동계(昇自東階)올라갈때는동쪽계단으로 △강자동계(降自東階)내려갈때는동쪽계단으로 △동입동출(東入東出) 사당에 들어 갈 때는 동쪽으로 들어가 도나올때도동쪽으로나온다. △알자찬인(謁者贊人) 인입묘우(引人廟宇) 알자와 찬인은 사 당안으로함께들어가제관을인도한다. △습급취족(拾級聚足) 사당의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합족을 한다. △입배지양(立拜止揚) 서서 절하는 일은 지양하고 반드시 큰 절로서예를다한다. △집례(執禮)의창홀(唱笏)에따라진행한다. △집사정기(執事定記또는執事定榜記)는집례(執禮)가창방 (唱榜)한다. △알자와찬인은현관인도시(引導時)헌관의왼쪽에나아가 읍한 후 헌관의 왼쪽 반보 앞에서 인도 하고 복위(復位) 후 헌관 에게읍을하고자기위치로간다. △ 집례(執禮)가 ‘謁者詣初獻官之左白謹具請行事(알자 예 초 헌관지좌백근구청행사)’라고창홀하면알자는초헌관의왼쪽 에 나아가 읍을 한 후 “請行事(청행사)”를 세 번 연창한다.이 때 초헌관은읍하고“行事(행사)”라고答한다. △예(禮)가‘謁者詣初獻官之左白禮畢(알자예초헌관지좌백 예필)’이라고 창홀 하면 알자는 초헌관의 왼쪽에 나아가 읍을 한 후 “禮畢(예필)”이라 세 번 연창한다.초헌관은 읍하고 “禮畢(예 필)”라고答한다. 향례를 마친 후 향례장소(墓 또는 齋舍)에서 거행하고 제집사 (諸執事)는 제물(祭物)을 나누어 참제원(參祭員) 각인(各人)의 앞에분배하고술을따른다. 1.먼저초헌관님준례순배를들겠습니다. ①집사는 먼저 초헌관님에게 작주하시고, 아헌관, 종헌관, 집 례,축관님의순서로작주를한다. ②대청에집사도참제관님에게술을따른다. ③본손들도술을따른다. ④초헌관이먼저잔을든다. ⑤모두잔을든다. ⑥(사회)이제오늘향례를봉행한성현을기리는초헌관님순 배를 들겠습니다.(초헌관님 순배입니다! 초헌관님 순배입니다! 초헌관님순배입니다!라고세번복창한다.) ⑦모두술을든다. ※준례는위와같은방식으로초헌관에이어아헌관,종헌관 순으로준례를한다. [강론(講論)] 준례후 원장님의 강론에 이어 초헌관이 강론하고 마지막으로종중유사가참례한유림에게인사를한다. [파좌(罷座)] 준례와 강론이 끝나면 초헌관에게 파좌 품의를 받고 “파좌(罷 座)아뢰오.”를세번연창하고모든제의절차를마무리한다. [홀기(笏記)] 는 은산부원군파 홀기와 대동소이하여 별도로 기 술하지않는다. 선생의 휘는 수춘(壽春) 자(字)는 경로(景老) 호(號)는 국담 (菊潭)으로밀성인(密城人)이다. 1572년(선조5) 11월 11일 경남 밀양 삽포리에서 문절공 도은 (文節公 逃隱 諱 文彬)의 8세손으로 태어났으며,한강 정구 선생 의 문인으로 시(詩) 문학(文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성리학에 밝았다.여헌장현광선생과교류하여토론을깊이하였으며시사 (時事)의 이해와 민생의 휴척(休戚)에 대하여 일찍이 마음에 두 지 않은 적이 없었고 사풍(士風)과 향헌(鄕憲)을 부식(扶植)하 는데더욱잊지못하였으니기덕업풍치(其德業風致)와청표고행 (淸標高行)이 아속(雅俗)을 진작시키고 인심을 감복시킬 만 하 였으며 충(忠), 효(孝),인(仁),예(禮)를 친행(親行)한 생애(生 涯)라한다. 일찍이 어버이의 명(命)으로 학업에 종사하여 여러차례 향시 (鄕試)에 합격하였고 나이 약관에 임진왜란을 만나 노유(老幼) 들과청송으로란(亂)을피하였다. 1593년 봄에 병화(兵火)가 생긴 뒤에 기근(飢饉)이 들었으며 역병(疫病)이 돌아 부모가 사망하고 자매(姉妹) 다섯 사람이 잇 따라사망하였다.선생도위태로웠으나소생(蘇生)하였다. 여위고떨리는몸으로몸소일곱상(喪)을산속깊은곳에집상 (執喪)하고 나물밥과 나물국을 조석으로 올렸고 항상 적은 쌀을 마련하여삭망(朔望)전(奠)을대비하였다. 이러한곤궁(困窮)중에도의지할곳없는소녀를거두어다가 매씨(妹氏)와함께거처하게하였다. 1597년봄에고향으로돌아와오직반장(返葬)하는장비(葬費) 마련에 심혈(心血)을 다하였으나 이해 가을에 왜구(倭寇)가 다 시 침입해옴으로 생각하기를 지난 임진왜란에는 왜적과 싸우지 못한 것은 어버이를 받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을 숨겼으나 지 금은나라를위하여죽을수있다하고격문을돌리고의병을일으 켜 망우당 곽재우와 함께 창녕 화왕산성을 고수(固守)하자 원근 (遠近)의 의사가 구름같이 모여 군용(軍容)이 정연(整然)하니 왜적의수장청정(淸正)이감히도망하였다. 1598년 전쟁이 약간 안정되자 운구(運柩)를 계획 친지들의 도 움을 마다하고 의례(儀禮)를 갖출 수 없으나 몸소 유체(遺體)를 부운(負運)하였으며 이 밖에 5喪도 차례로 풍각 북쪽 기슬에 반 장(返葬)하고체백(體魄)에소요되는제반준비에정성을다하였 다. 영감(永感-부모를 잃어 오랫동안 슬퍼하는 일)후에는 일체의 영달을구하지않고장왕(長往-영원히가다즉가서오래머무르 다)의 뜻을 두어 풍각현 북쪽 산 아래로 이주하였으니 지금의 각 북면남산리다. 1618년(광해10) 광해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幽廢)시켰을 때 간신배의 기세가하늘에 닿았으며 명유(名 儒)들이 쫓겨나고 온 조야(朝野)가 진동(震動)함으로 이에 대해 말하는이가없으나선생은홀로소를지어극언(極言)하고간신 배들의 죄상을 역설, 대궐에 나가 소를 올렸는데 광해가 그 소를 받아들이지말라하였다. 이에 선생은 시를 지어 개탄(慨嘆)하기를 서궁문폐이윤두 북 궐운심일월혼(西宮門閉彛倫西 北闕雲深日月昏-서궁에 문이 굳 게 닫혀 윤리가 무너지고 대궐에 구름 깊어 해와 달이 어둡네)이 라하자사람들이그충직을감탄하였다. 1636년(인조14)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서울이 함락하 자 의병을 일으켰다가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세자 등 호행(扈 行)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 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 을 건너 환도하자 선생은 침식을 잊고 나는 숭정(崇禎)의 처사 (處士)이지청나라의백성이될수없다는결의를보이는시를지 었다.(入山甘作崇禎士處世羞爲丙子民-산에들어가즐거이숭정 처사되려함은병자호란에항복한백성으로세상사는것이부끄 러워서이네) 그후로세상사와단절하고산중에서학문을닦고강론하며후 학을양성하는데에만전념하였다. 1625년(효종3)11월8일에81세를일기로고종(考終)하니사림 (士林)들의 애통함이 친상(親喪)을 당하듯 하였으며 야노산승 (野老山僧)까지도눈물의바다를이루었다한다. 1672년(현종13)에 통정대부 호조참의(通政大夫 戶曹參議)에 증직되고 밀양 후포에 불천위(不遷位)로 전향(奠享)하며 청도 남산의남강서원과대구동구망우당공원내임진왜란충의탑(忠 義塔) 감실(龕室)에 봉안 전향(奠享) 한다. 저서로는 독서지남 (讀書指南), 학문류해(學文類解), 도통연원록(道統淵源錄), 동 방학문연원록(東方學問淵源錄), 의례견문록(疑禮見聞錄),국담 선생문집록(國潭先生文集錄) 등이 남아 있고 국담선생 문집 판 목이보존되고있다. 부패(腐敗)와권력이난무(亂舞)하는시대라할지라도청렴결 백하고맡은바직무수행에살신보국(殺身報國)혜성(彗星)처럼 빛나는현인이있으니바로오졸재선생인가한다. 선생의 휘는 한주(漢柱)자(字)는 천지(天支) 호는 오졸재(迂 拙齋)이며밀성인(密城人)이다. 1459(세조4)년 밀양부 풍각현 흑석리 차산(현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에서 문절공 도은(文節公逃隱)선생의 증손으로 태어났 다. 7세때에 이미 문자를 해독 할 줄 알았으며 16세때 점필재 김종 직(1431~1492조선전기의성리학자·문신.영남학파의종조)선생 의 문하에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선생 등과 동문수학하 였다. 성종때생원진사시에합격하고문과에제2등으로급제하여직 장(直長), 감찰(監察)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으로 제 수되었다. 성종이 유교존숭(儒敎尊崇)하고 문교정치(文敎政治)에 주력 함에 신명을 다하여 충성을 바쳤다. 그 때 이세좌(李世佐) 등 임 금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을 탄핵했다가 추문(推問)을 받아 성균 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옮기게 되자 母夫人을 봉양해야 한다는 뜻을담아외관직을청하여창녕현감으로나갔다. 뿐만아니라 매일같이 성근(省覲)을 하고 직무로 인하여 문안 을 못하면 밤을 이용하여 필마(匹馬)로 근친(近親)하고 등청하 였다. 또, 구종(驅從)없이 필마(匹馬)로 여리(閭里)에 암행하여 민 정을살폈으며춘추로양로연을베풀고돈본선속(敦本善俗)하니 효제(孝悌)와염치(廉恥)의풍속이조성되고사민(史民)들이어 버이처럼 애모(愛慕)하니 성종이 치적제일(治積第一)이라고 교 서(敎書)를내려크게포상(褒賞)하였다. 1497(연산3)년에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 겸 춘추관(春秋 館)기주관(記注官)에 제수되었으며 간관(諫官)이 되어 왕의 실 정(失政)을 극간(極諫)하고, 노사신(盧思愼)·임사홍(任士洪)을 탄핵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두 간신(奸臣)의 모함(謀陷)을 입기 도하였다. 선생은 험란한 조정의 간신을 지척(指斥)하고 군심(君心)을 바로잡기 위하여 직간하였다. 친구들은 보신(保身)하라 하였으 나선생은「신하가직도(直道)로섬기다가갈뿐이다.사생(死生) 은 하늘에 메였으니 어찌 자신을 도모(圖謀)하여 불의에 빠지는 임금을그냥볼수있겠는가」하였다. 선생은다시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옮겼으나연산군이날로 황란(荒亂)하고국사가잘못되자양친(養親)을위하여외관직을 청하여 평해군로 제수했다가 고향이 멀다하여 예천군수로 바꾸 게되었다. 선생의 나이 40세 되던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점필제 선생의 문도(門徒)로서 붕당(朋黨)을 만들어 국정을비평(批評)하여시사(時事)를비방하였다는죄목으로경 사(京師)에나치(拿致)하여80도로결장하고벽동(碧潼)에부처 (付處) 했다가 3년만에 호남의 낙안군으로 이배되어 그 곳에서 후진을 훈회(訓誨)하여 최두산(崔斗山)과 같은 많은 명사들을 배출호남학문의연원이선생으로부터나왔다하겠다. 1504년(연산10)5월 15일 갑자사화로화를당하니선생의나이 46세이다. 선생이 영면한지 13년 뒤인 1517년 도승지(都承旨)에 증직(贈 職) 되었으며 133년이 지난1634년(인조 15)에 예림서원(밀양시 부북면후사포리)에배향되고172년이지난뒤에학사김응조(鶴 沙 金應祖)가 여표비명(閭表碑銘)을 지어 선생의 구여(舊閭)인 차산(車山)에세웠다. 선생을제향하는서원은사액서원(賜額書院)인밀양의예림서 원, 청도남산의 남강서원, 함안의 덕암서원, 청도 풍각의 차산서 원,풍각흑석의석강서원이며문집으로는오졸재선생실기가있 다. 남강서원(南岡書院) 남강서원전경 4월23일제향 에참례한제관이함께하고있다. 남강서원은 경북 청도군 각북면 남산2리에 있다. 창건당시국담박수춘(菊潭朴壽春1572-1652)선생 을 봉안하였고 그 후 23년 뒤에 오졸재 박한주(迂 拙齋 朴漢柱 1459-1504)선생을 추배 배향하고 있 다. 남강서원이 자리 잡고 있는 남산2리는 1587년에 국담 박수춘 선생이 터를 다지고 예숭(禮崇)의 동 풍을동민들의생활속에심은후대대로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1691년(숙종20)에 사림 (士林)의 공의(公議)로 건립 국담 선생을 봉안하였 고,사우(祠宇)를양현사(兩賢祠)라하였다. 대원군의서원훼철(1868년)의불운을맞기까지20 0여 년 간 영호남의 유풍진작(儒風振作)과 인재양 성등명실공이충효정신의본산이었다. 남강서원이훼철된후일제침략의36년과6·25동 란등시대적변천은다사다난하였고,130년이지 나는 동안 서원 복원은 누대(累代)의 숙원이 되었 다.1995년에이르러후손박양흠(朴陽欽)씨가1억 원의거금을헌성함을계기로후손들의열화와같 은정성과헌성으로붐을일으켜수천에서수백만 원혹은수십만원씩각자형편에따라헌성하는사 림들이 이어져 서원복원을 결의 1995년 8월 29일 서원 기공식에 이어 1998년 11월 6일 서원을 복원 하고봉안식을갖게되었다. 서원에는 국담선생 추선록(목판본 21.6×31.8)을 포함한 다양한 고문서와 교지, 당시의 편액,제기 (祭器),당대의 거유(巨儒)김종직,김굉필,조광조, 이황, 정여창과 나누었던 유묵이 있으며 국담집, 추선록,자손록,밀성박씨 연계도,선현유묵,양현 록,오졸재실기,남강서원청액소,등이목판으로 보존되고있는반면제향또한엄격하다. 경북지역 유림주관으로 봉해지는데 제향일은 매 년음력3월15일이다. 분정기, 편의상목판으로 만들어 직책을 넣고 당일 개좌에서 제집사를천 거한후기록한다. 제례준비 진설을마친제상 행사 망료례,축을불사르기전반드시초헌관에게확인을거친다. 준례 준례광경 배향인물 국담박수춘(菊潭朴壽春1572-1652)선생 오졸재박한주((迂拙齋朴漢柱1459-1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