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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5월31일 금요일 2 (제209호) 관향조 종친회 죽음의 문턱에서도 신라의 신하 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왜국의 잔악함을 항변했던 신라만고충신 관설당 박제상 선생의 추모제향이 대마도 이쿠치하미 해변 센묘아키 야마소재순국비에서있었다. 이날 제향은 부산국제여객선터 미널에서 오전 8시 집결하여 출국 수속을 마치고 9시 10분 출발하여1 시간 30여분에 걸쳐 히타카츠(Hita katsu)항에 도착 예약된 관광버스 로 현지로 이동하여 제향마다 나타 나는 환생조로 여겨지는 큰 새(매 과 추정)의 환영 속에 봉용 현종(영 해)의 집례로 성수 오릉보존회 총 재(영해), 구근(九根) 경주박씨 종 손, 상권 강릉박씨대종회장 순으로 헌작하고 종수 오릉보존회 사무총 장의 독축으로 엄숙봉행되었으며, 흥열 영해박씨본부장, 하웅 영해박 씨부회장이좌우집사를맡았다. 제향에 참례하는 길은 험난했다. 파도가 높아 승선한 승객들의 멀미 로선내에는무척혼란한가운데지 금은 쾌속선으로 1시간 30분 만에 도착한 길을 선조 박제상공은 목선 으로먼길을밤낮으로항해하여주 어진 임무를 완수했다는 생각에 후 손들은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현지에 세워진 안내표지판을 보고 는일본과우리의역사관그리고왜 곡편향된사실에놀라기도했다.표 지판을보면다음과같다. 뷺동(東) 아시아의 격동기(激動期)였던 오세기초두(五世紀初頭) 신라(新羅)는 왜 (倭)와 통교관계(通交關係)에 있었으며 新 羅에서는 친선(親善)을 위하여 내물왕자 (奈勿王子) 미사흔(未斯欣)을 왜에 파견하 였다. 그후 미사흔의 귀환(歸還)이 늦어지 자눌지왕(訥祗王)은사신(使臣)박제상(朴 堤上, 毛麻利叱)을 왜에 보내어 왕자(王子) 의 환국(還國)을 요구하였다. 미사흔과 신 라국사일행이 귀국(歸國) 도중 대마도의 이곳 조해수문(粗海水門)에서 충돌이 일 어나지모(智謀)와용기(勇氣)를겸비한 朴 公은왕자를무사히귀국시키고자신은이 곳에서순국(殉國)하였다고양국의고기록 (古記錄)에 보인다. 이렇듯 충절(忠節)을 지킨 신라만고충신 박제상공의 숭고한 뜻 을기리기위해순국비(殉國碑)를세우다.뷻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븮친선 을위해미사흔을보낸게아니라볼 모였으며, 한국의 역사에서는 박제 상공이 목도로 끌려가 전향을 요구 당하며 달콤한 제안과 잔인한 고문 을 당하고 불에 타죽었다븯고 나와 있고, 일본의 역사서(일본사기)는 대마도에서 일본장수 습진언(襲津 彦)이 속은 것을 알고 불태워 죽였 다고나와있다. 그리고 순국비 전면에 신라국사 박제상(모마이질지)순국지비[新 羅國使朴堤上(毛麻利叱智)殉國之 碑]라 쓰였고 뒷면에는 나가도메 히사에(永留久惠)씨를 비롯한 추 진위원명단이적혀있다. 박제상(朴堤上)선생의 또 다른 이름은 모말(毛末)이다. 븮일본서기븯 권9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전기 (攝政前紀) 5년 3월조에서는 모마 리질지(毛麻利叱智)라고 기록하고 있고, 이 같은 이름과 선생의 충절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박제 상전, 븮삼국유사븯, 븮일본서기븯 등에 나온다.그러나 ‘신라만고충신 박제 상공의숭고한뜻을기리기위해순 국비를 세우다.’라고 말미에 적고 있어비록고문과회유로인해죽임 을 당했어도 후(後)에 일본인들 또 한 신라만고충신으로 숭상하고 있 어 분명 관설당공은 전무후무한 충 신임에는 틀림이 없는 사실에 후손 들은위안을삼고정성껏제향을올 려돌아오는발길을가볍게한다. 한편이날제향후가진오찬에서 박성수 회장은 관설당 할아버지의 후예 경주, 강릉, 면천, 영해박씨들 이한자리에모여제향을올리게되 어 분명 할아버님께서도 기뻐하셨 을 것이라며 단합을 강조하였으며, 박상권 강릉박씨대종회장은 더욱 돈독한 정을 통해 선조 현창사업을 추진할것을,박구근경주박씨종손 은 처음 참례해 송구하다고 말하고 선조의 충절을영원토록기리자.박 경석 면천박씨대종회장은 신라만 고충신의 후예임이 자랑스럽다. 등 제향참례 소감을 밝히고 내년 제향 에도 함께할 것을 다짐했다.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신라만고충신관설당박제상선생순국추 모제향봉행 대마도이쿠치하미해변센묘아키야마현지,후예40여명참례 제향때마다어김없이나타나는큰새를후 손들은환생조라며반기고있다. 고려공민왕조에 혁혁한 공을 세 워 벽상공신으로 공신관에 초상화 가걸린박춘선생과그의아들찬성 공(휘인지),손자군수공(휘정손), 내금위장공(휘형손)등4위의제향 을 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 360-4 서석단(瑞石壇)에서 한학자인 박 정규 대종회장의 집례로 각 단소에 분정된제관이들어선가운데질서 정연하게봉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30여년 총무를 맡아 온상섭총무의아들결혼식과겹쳐 상섭총무는오전일찍단소에나와 천막을치고제수를옮겨온후제관 분정을 마치고 오후2시에 예정된 결혼식을 위해 자리를 뜬 상태에서 종원 모두가 협심 단결하여 제례를 무사히 마치게 되어 정규 대종회장 은총무의어깨를가볍게해주어감 사드린다고 말하고 지속적인 협조 를당부했다. 서석단은 고려벽상공신에 오른 박춘선생을요승신돈이‘권세지가 븯(權勢之家) 즉 구가세족을 혁파한 다는 명분으로 최영 장군과 1차로 유배를보냈다.이후최영은복귀했 고 박춘 선생은 1차유배지 광양에 서머리를깎아울주군열암사로이 배 후 부하 왕안덕(王安德)과 배인 길(裵仁吉)보내 암살,시신을 바다 에빠뜨리는등억울한참화를당한 이후향화를받들지못하다이곳화 암동 360-4 대지에 단을 마련하고 제향을올리던중세월의흐름에따 라 울타리는 녹이 슬어 흉물스러워 지고 바닥은 깨지고 솟아올라 걸음 마저 어려울 지경에 이르러 수차례 정비사업을 추진하였으나 각종 규 제에묶여뜻을이루지못하다가20 19년상섭총무의지혜로어렵게관 계당국의 허가를 받아 성손들의 성 금으로새롭게태어났다. 특히 성역화사업에 상섭 총무 (본보 편집국장)와 아들 진현, 신 현 삼부자가 먼저 헌성을 하면서 종원들의 헌성이 이어져 성공적인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으며, 공사 마무리후일천여만원의잉여금을 일반예금에 귀속하게 되어 종원들 은무한한신뢰를보내면서제향후 시내예식장에대거참석축하를아 끼지않았다.상섭총무의아들진현 군은 전남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본사에 근무 후 2024년 1 월1일부로이직하여광주과학기술 원연구기획팀에재직중이며,자부 이송은 양은 전주이씨 양녕대군 후 예로 같은 대학 국악과 가야금전공 으로 현재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고있다. 고려벽상공신박춘선생추모제향봉행 총무상섭(본보편집국장)자녀결혼대거참석축하븣파보편찬븡서석단정비사 업에삼부자공헌커 고려벽상공신박춘선생시향이지난달28일봉행된가운데제관이한자리에모였다.사진 앞줄왼쪽부터종원축관연규아헌관,남식초헌관.현준종헌관,정규집례관,서석단본단 제관은지파에서윤번제로제관을맡는관례에따라인재공종중에서맡았다. 율곡의 주자가례를 따르고 있는 밀양박씨 사문진사공파 삼송재 춘 향이 지난 달 22일 오후 3시 사문진 사공외선조6위단소를시작으로2 3일 간의대부공, 정재공 묘, 6위 단 소, 신령감무공 묘제 순으로 각각 봉행되었다. 22일 봉행된 사문진사공 외 6위 단소의 제향은 인석(仁奭) 전 지마 왕릉 참봉의 집례로 순기(淳基) 현 종이 초헌관으로 분향과 강신 그리 고 첫잔을 올리고 현수(賢守) 현종 의 독축으로 이어졌다. 이후 호철 (浩澈), 대엽(大燁) 현종이 아헌관, 종헌관으로 헌작하고, 분축과 조상 이복을내리는말씀을전하는致告 意 詞(치고하사)가 진해된 가운데 축관은 초헌관의 왼쪽에 나아가 동 쪽을 향해 븮조고명공축(祖考命工 祝, 할아버지가 축관에게 명해서) 하야 승치다복우여효손(承致多福 于汝孝孫,너희손자들에게많은복 을 받게 하노니 오너라)하노니 래 여효손(來汝孝孫, 손아)아 사여(使 汝, 너로 하여금)로 수록우천(受祿 于天, 하늘에서 복을 받게 하여)하 며 의가우전(宜稼于田, 논밭에 농 사를 잘 짓고)하야 미수영년(眉壽 永年, 오랜 세월 누리며)에 물체인 지(勿替引之, 기울어지는 일이 없 게 계속 하여라)하라. 할아버지가 축관에게 명해서 너희 손자들에게 많은복을받게하노니오너라.효손 아너로하여금하늘에서복을받게 하여논밭에농사를잘짓고오랜세 월누리며기울어지는일이없게계 속하여라븯라고한다. 이는 율곡의 주자가례에서 전해 지는 것으로 축관이 초헌관의 옷소 매에 북어포를 넣어주는 것으로 복 을내리는의식을마무리한다. 사문진사공(四門進士公派)의 휘 (諱)는 원(元)으로 고려조에 사문 진사 또는국자진사를역임했다.밀 성대군(密城大君 휘 언침)의 10世 支孫(시조 39世孫)으로 太師公 彦 孚의둘째아들諱義臣의長子다.父 (義臣)는 문하시중 효신(孝臣)의 동생으로 당대의 文章家로 공부상 서(工部尙書)를 지내셨으며, 고려 인종은효신,의신양형제를효의양 신(孝義兩臣) 고려주석(高麗株石) 이라 부르고 동방대성(東方大姓) 이란어필넉자를하사하였다. 유지는 밀양시 하남읍 귀명동이 라하나전하지아니한다.배위는계 림김씨이며 원덕사에 배향하였고 전북 김제시 상동(삼수동)에 삼송 재가있어설단하여제향한다. 다음날 봉해지는 간의대부공과 정재공은 숙질간으로 고려 충신이 다.간의대부공 휘 인익(仁翊)은 고 려조에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고 려가망함에따라전북김제로낙향 조카인 정재공과 함께 불사이군의 충절을지켰다. 정재공(휘 의중)은 려 충숙왕 복 위(復位) 6년 丁丑(1337)에 태어나 공민왕 4年 乙未(1355)에 이색(李 穡) 등 22人과 같이 박학굉사과(博 學宏詞科)에 합격하시고 서녕군 (瑞寧君) 류숙(柳淑)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두분 선생문하에 종유(從遊)하여 성리학에 더욱 정 진하였다. 주요요직을거쳤으며,고려흥왕 (禑)14년戊辰(1388)5月에국서(國 書)인 철영위 철폐(鐵嶺衛 撤廢)에 관한 진정전(陳情箋)을 받들고 명 나라에 들어갈 때 행장(行裝)이 검 소하여요동진무(遼東鎭撫)서현이 先生의 청고함에 감복하여 이 사실 을 례부에 告하니 황제는 듣고 국빈 례(國賓禮)로대우하고철령위문제 (鐵嶺衛問題)를잠재웠다. 후에예문관제학겸성균관대사 성에 임명되었다가 곧 이성계(李成 桂)의 혁명으로 고려는 망하고 이 씨혁정당시(李氏革正當時)즉1392 年 10月에 杜門洞에 들어갔다가 지 병이 있어 숙부인 간의대부公(仁 翊)과 더불어 전라북도 김제로 퇴 둔하여 후학을 가르치시며 두문자 정(杜門自靖) 하니 조선조 태종이 사방으로 찾아 검교참찬의정부사 (檢校參贊 議政府事)로 여러 번 불 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불사이 군(不事二君)의忠節을지켰다. 한편 22일 개최된 정기총회는 박 효명·흥식 감사의 감사보고와 수· 지출 결산을 원안대로 처리하고 20 24년 사업계획으로 △종토 재실 보 존 보수관리 △전례위원회 활동 활 성화 △인터넷족보 구축사업 △상 동동 소재 종중위토(대지) 희망임 차인 불하사업 △묘소 수목정비 등 을 선정하고 이에 대한 예산(안)을 원안가결했다. 이중 △인터넷족보 구축사업은 현재 대보사에서 기초작업인 구보 스캔작업을마무리단계에있으며 , 종중에서 요구하는 시스템 즉 관리 시템을 체계화하는 프로그램이 마 무리 단계에 있어 조만간 인터넷족 보 추진위를 구성하여 본격적으로 추진될전망이다. 이에 박원주 회장은 인터넷족보 는 후예들에게 중요한 사업으로 누 보되는 종원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협조를당부했다. 한편 이날 회의에는 하남에 소재 하는 일옹공파 종친회(회장 순기, 초헌관)에서 고급 벽시계를 삼송재 에전달했다. 밀양박씨삼송재시향봉행 삼송재춘향이지난달22~23일양일에걸쳐봉행된가운데첫날인사문진사공이하6위단 소에서제향후제관이함께하고있다.왼쪽부터원주대종회장,현수축관,대엽종헌관,호철 아헌관,순기초헌관,인석집례,원준명예회장) 전자족보구축에심혈기울일것븣협조당부 삼송재재향신위세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