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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증언한다. 단군께서 나라를 여신 이래 우리 겨레는 반만년의 긴 역사를 한 핏줄로 이어오며 이 땅에 독특한 문화의 꽃을 피워왔다. 이 나라 한복판 경기도의 동북부에 자리한 가평군은 높은 산 깊은 계속에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풍광이 수려한 고장이다. 빼어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온 가평군민은 풍습이 아름답고 충의를 숭앙하여 불의와 폭력에 꺾이지 않는 기개가 넘친다. 제국주의 일본이 침입하여 나라를 강점하고자 했던 시기에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않는 선열들의 헌신적 노력과 희생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을미년(4228) 8월 10일 왜적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격분한 국민들이 각지에서 의병이 자연봉기하여 싸웠고 가평에서는 북면을 근거지로 의병이 봉기하니 기세는 당당하고 격렬한 저항이었다. 4229년 4월 보납산 전투에서는 강원도 의병들과 연합하니 격렬한 저항으로 쌍방의 피해는 실로 컸었다 하나 우리 국력의 부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가평의병대장 이충응 부대장 신재희 의병장 정문위 세 분은 끝까지 싸우다 순국하셨다. 가평 의병에 가담했던 분들이 수백명에 이르고 순국하신 분도 10여명으로 전하고 있으나 증거 인멸로 31명의 선열만을 비에 새기게 됨을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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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2년 3월 1일 서울탑골공원에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이 발표되었고 이 고장 출신인 정한교 신태연 (신숙 선생의 구명) 민영순 세분은 독립선언문 제작과 운반하는데 함께 참여하여 책임을 다했으며 이규봉 선생의 주도로 3월 15일 북면을 시발로 가평군 소재 각 면에서 수 천명의 시위군중이 운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짖는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였다. 가평군민은 3.1정신으로 자주독립의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때 체포 투옥된 사람이 28명 이었으며 최종화 선생은 모진 고문에 못 견디어 옥중에서 순국하셨다. 또 고문에 불구가 되신 분도 있으며 만세로 연루되어 일생을 방황하며 숨어서 사신 분도 있었다. 국외에서는 박장호 선생이 기원 독립단 총재로서 만주 벌판에서 항일운동의 선구자로 왜적과 장렬하게 싸우다 순국하셨다. 그리고 신숙 선생은 국외로 망명하여 국제무대에서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규탄하고 조국광복에 큰 공을 세우셨다. 한때 나라를 빼았기고 독립을 찾기 위하여 우리 선열들이 잃은 목숨이 그 얼마이며 흘린 피가 그 얼마이며 탄압에 고통받은 이들은 그 얼마이었던가. 이제 우리는 자주독립의 숭고함을 되새기고 온 겨레의 줄기찬 저항정신의 뜻을 이어받아 이 땅을 지키고자 이 고장선열들이 희생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리며 가평군민의 호국하는 기상을 후대에 전하는 교육장으로 승화시키고자 군민의 정성을 모아 보납산이 바라보이는 화성벌 언덕 위에 비를 세운다. 하늘에 계신 선열들의 영령이 이를 굽어 살피시고 군민이 이를 우러러 볼 때 충의의 정신을 새롭게 할 것으로 믿는다. 단기 4327년 3월 1일 가평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