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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忠)을 세우다
곽사(조선 초) : 본관 현풍, 세종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까지 올랐다. 세조의 찬탈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그의 아들 부위 득창과 옥황동에 몸을 피하여 일생을 마쳤다. 남일면 초현리 정의사에 배향했다.
신정 : 본관은 영산, 고려 우왕 6년(1380)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가 고려말에 중정대부 예문관직제학에 이르렀으나 이조가 들어서자 불사이조의 절의를 지켜 금산군 제원면 대산리로 칩거하여 여생을 마쳤다. 제원면 대산리 대산사에 배향했다.
김종한 : 자는 국보(國甫), 본관 순천, 절재 김종서의 형으로 문종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세조의 탈권 음모로 당시의 좌명공신을 모조리 숙청하려 할 때 금산에 유배되어 평생을 이곳에서 귀향살이 했다. 그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으며 영조때 그의 절의를 찬양하여 이조판서의 관직을 복관시켰다.
정인조 :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종철(宗哲)의 아들이다. 1393년(태조2년) 이조판서가 되었고, 1414년에 월성군(月成君)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시호를 받았다. 금산지역에 왜적이 들꿇자 1402년 그가 거주하던 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금성면 대암리 삽재성과 동정리 동정성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순절하였다.
박인(조선 초) : 자는 성상, 호 의율재, 본관 반남, 힐의 증손, 문과에 급제 초산군수를 거쳐 진산군수로 있던 중 세조의 찬위소식을 듣고 아들 희권과 같이 격문을 삼남에 돌려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금산에 은둔하여 세상을 마쳤다. 남일면 마장리 숭모사에 배향했다.
박희권(조선 초) : 자 천경, 호 임회당, 본관 반남 박인의 아들. 진산군에 있을 때 세조의 찬위한 소식을 듣고 영월로 달려가 상왕을 모시려고 떠나려 할 즈음에 90세된 할머니의 만류로 못가게 되고 단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 통곡하고 집안 후원에 단을 모아 매년 10월 24일이면 제수를 차려놓고 제사를 올렸다. 남일면 마장리 숭모사에 배향했다.
효(孝)를 높이다
윤택(1289~1370) :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중덕(仲德), 호는 율정(栗亭)이다. 충목왕 초에 나주목사가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정사는 관대하고 약한 사람은 도와 명성이 높았다. 1363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더하였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금산군 남일면 초현리로 돌아와 모친을 극진히 모시며, 진악산에서 독서와 저술에 힘썼다.
김신(고려후기) : 고려의 문신. 본관은 진래(進禮). 낭장을 지낸 왕연(王涓)의 사위이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올 무렵에 왜구들이 금산에 쳐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집들을 불태웠으며 재산을 약탈해갔다. 김신의 어머니도 함께 죽었는데,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그는 하늘을 우러러 기도 드렸다. 그러자 맑은 하늘에 구름과 안개가 덮이더니. 천둥 벼락이 쳤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니 흰 뼈가 푸른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의 시신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김신은 곧 그 뼈를 거두어 정성껏 장사 지냈다. 그 뒤 조정에서 사우(祠宇)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한교(1157~1221) : 자는 명보(明甫) 호는 회묵재(晦黙齋)이며 본관은 금계니 금계한씨의 시조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19세때 어머님 병환이 날로 위중하므로 한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구환(救患)했으나 효험이 없자 혈지관구(血脂灌口 )하여 소생시켜 수개월동안 연명하게 했다.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자 여막을 짓고 죽을 먹고 곡읍(哭泣)하여 3년상을 마치니 인리십실(隣里十室)이 공의 지극한 효성에 감화되어 모두 효자가 되었으므로 그 동에 이름을 효자리라 부르게 되었다.
김천석 : 초명은 세석, 자는 흥숙, 호는 매은(梅隱)이니 진산김씨의 시조이다. 어버이 섬기기를 지성으로 하여 날마다 활을 메고 사냥을 하여 부모를 공양하였다. 세조 1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리, 춘추관제학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전라도 감사에 올랐으며, 나라에서 정려문(旌閭門)을 내려 마전리 미삭이 부락 앞에 세우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