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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 고종의 밀지와 해산령 진주의병은 일제 침략의 교두보였던 부산진격을 위 해 김해로 별동대를 보냈다. 의병들은 김해에서 4월 11 일과 12일 접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4명을 살상시키는 전과를 올렸지만, 의병 역시 4명이 전사하고 20여명이 부상을 당해 진주로 철수했다. 노응규는 서재기와 정한용에게 각각 육십령 아랫마 을인 안의와 대구로 통하는 길목인 합천군 삼가면으로 보내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던 중, 고종으로 부터 의병진을 해산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의병을 일으키라던 고종의 밀지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내려진 해산명령, 근왕창의(勤王倡義), 거 의토적의 명분을 내걸고 창의했던 진주의병장 노응규, 정한용 의병장은 4월 19일 왕명에 따라 의병을 해 산하고, 진주성에서 철수하였다. 진주성 논개의 촉석루와 남강 의병장 노응규 순국비 ▶ 의병, 호서지방 홍주성을 장악하다. 을사늑약에 분노한 애국지사들이 홍산(현재 부여군 내산면) 에서 봉기하여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서천, 비인, 남포 등을 점령하면서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그러한 기세를 몰아 의병진이 홍주성을 공격한 것은 홍주 장날인 1906년 5월 19일이 었다. 1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부대는 홍주의 삼신당리에서 일본군 과 싸워 이기고, 구식 화포 2문을 선두에 내세워 홍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의병부대의 우세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한 일본군과 관군은 북문을 통해 덕산방면으로 도주하였다. 드디어 홍주성이 의병들에 의 하 여 장악된 것이다. 민종식은 홍주의진을 새롭게 편제하고 홍주지역 부정부패한 관리와 아전들을 응징하는데 앞장 섰 다. 의병 지휘부는 충남의 서북부 지역 인사가 중심이 되었다. 정산면의 박윤식, 이식, 화성면의 안병찬 형 제, 안항식, 채광묵, 임한주 형제, 장평면의 이 설 · 김덕진, 한태석 형제 등이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정산에 은둔하고 있던 전 참판 민종식은 5월 11일 홍 산에서 의병의 기치를 들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서천 · 남포 · 보령 · 청양 등지의 의병을 규합한 민종 식 부대는 서부지방의 중심지인 홍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부대 병력은 1,000여명으로서, 그 중 신 식 소총과 화승총 등 화기류로 무장한 병력이 500여명, 창검과 활 등을 소지한 병력이 200여명, 나머지 는 비무장이었다. 5월 19일 오후 홍주에 도착하여 서남쪽 남산에 진을 치고 공격을 시작하였다. 당시 홍주성에는 일본 군 헌병부대와 거류민 등이 남문쪽에서 대거 항전하였다. 이에 의병부대는 맹렬한 사격을 가하면서 남문 을 집중 공격하였고, 남문을 지키던 일본군 헌병과 거류민들은 마침내 의병의 공격을 당해 낼 수 없자 덕 산 으로 패주하고 말았다. 홍주성 관찰부 홍주성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