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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엄정한 군율 강조, 소수 정예의 게릴라전술 전개 이때가 1908년 5월을 전후한 시기로서, 평민출 신 의병장들이 의병항쟁을 주도하던 시기와 일 치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는 진동본진분파 대장의 이름으로 보국구민의병을 표방하였는데, 국가와 동포를 사랑하는 한결같은 자세를 견지 하였다. 이들은 반봉건적, 반침략적 성격의 의병 을 지향하였는데, 엄정한 군율을 강조함과 동시 에 소수 정예의 게릴라전술을 전개하였다. 1908년에는 황해도 안평(安平)의 순사주재소와 수안(遂安)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 헌병을 사 살하였고 또한 함경남도의 마전도 순사주재소를 급습하여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그 뒤 1911년 김 진묵(金溱默)의병장의 부장으로 각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계속하여 다대한 전과(戰 果)를 거두었다. 이후로는 부하 3∼400여 명을 휘하에 두고 의병장이 되어 경기도·강원도·황해 도·평안도·함경도 등 각도를 신왕귀래(神往鬼來)하면서 항일전을 전개한 바 있다. 1913년 6월 3일 밤에는 황해도 대동리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사살하고 일본수비대를 불질러 일본군 수명 을 부상케 하였다. 한편 오승태(吳承泰)와 합세하여 선암(仙岩) 헌병분견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1915년에는 평안남도 성천 군 옥정리(玉井里) 산기슭에 근거지를 두고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군자금을 조달키 위해 7월 초에 부유한 한인에게 항일독립사상을 고취시켜 군자금 조달에 협조하도록 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일제, 채응언 체포를 위한 특별수색대 조직 이렇게 격렬한 항일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채응언의 활 약으로 인해 20여 명 이상의 일본헌병과 일제에 아부하 던 부일한국인 밀정 등이 처단 당하자, 일제는 그를 체포 하고자 소위 「적괴 채응언수색대」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 은 평양 헌병대에서 일년 전부터 일본 헌병 상둥병과 보조 원 4명을 1대로 하여 5개 대를 편성하여 오오하시(大橋)대 장의 직속하에 두어 그의 체포에 진력케 하는 한편 현상금 280원을 걸어 일반인에게 밀고하도록 독려하는 등의 조 치를 취하게 되었다. 채응언 의병장 격문 채응언 의병장이 체포되었음을 알리는 <매일신보> 보도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