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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87 ▒ 독립장│채응언(蔡應彦) 1915년은 대한제국기 의병사에서 매우 주목되는 해이다. 의병이 종식된 해로서 올해로 100주년에 해당하기 때 문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의병활동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1915년에는 일본에 의해 자행된 경복궁침 범 사건과 을미사변 그리고 단발령을 계기로 시작된 의병항쟁이 약 20년의 대단원을 내리는 상징적 사건이 있 었 다. 바로 의병장 채응언의 체포가 그것이다. 1907년 군대해산령으로 통분 이기지 못해 의병 투신 의병장 채응언은 평안남도 성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황해도 곡산으로 이사하여 화전을 전 전할 정도로 가난한 농민이었다. 하지만 건장한 체력과 용기를 바탕으로 협객적 농민으로 성장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저항하였다. 19세기 후반 외세의 침탈로 위태로워진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우국적 지사로 변모하였다. 일제의 정치 경제적 침탈이 본격적으로 자행되던 1907년 중반, 대한제국의 육군보병부교(陸軍步 兵副校)로 복무하던 그는 1907년 군대해산령이 내리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 고자 의병에 투신하였다. 처음에는 유인석 계열의 의병부대에서 잡일을 하다가 능력을 인정받아 소 모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의병장이 전사하자 그가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소수 정예 게릴라전으로 일제 타격한 마지막 의병장 평안남도, 강원도 일대를 무대로 엄정한 군율을 강조함과 동시에 소수 정 예의 게릴라전술을 전개하며 일제에 대해 적극적인 무력항쟁 전개 ● 1879년 평안남도 성천 출생 ●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부대 부장으로 활약 ● 1908년 황해도 안평순사주재소·수안헌병분견소, 함경도 마전동순사주재소 공격 ● 1911년 의병 해산을 거부하고 의병대장으로, 북한지역에서 항일 무장투쟁 ● 1915년 11월 4일 평양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핵심공적 주요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