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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85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은 평산 지역의 화서, 의암계 유학자인 변석현, 채홍두, 박기섭 등과 함께 평 산군 궁하면 산두재에서 의병 거의를 논한 후 깊은 산 속인 도평산에서 평산의병부대를 조직했다. 그 후 사방에 격문을 돌리자 격문을 보고 농민, 포수, 해산 군인 등 4~5천 명의 의병이 모였다. 평 산의병부대는 전판관 우병렬이 실질적으로 부대를 총 지휘하는 가운데 돌격장, 유격장 그리고 7명 의 중대장이 각기 소부대를 편성했고 선생은 유격대를 맡았다. 의병들은 유리한 산악지형을 배경으 로 항일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거의 마지막까지 국내에서 활약한 평산의병대 이진룡 선생은 유달수, 한정만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일본군 토벌대를 소탕해 황해의병 활동에 사기를 북돋았다. 평산의병대가 황해지역을 장악하자, 일제는 1907년 말 특별 부대를 구성해 선생의 부대를 공격한다.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차례로 격퇴했지만 계속된 공격으로 의병부대는 점점 약해졌다. 선생이 부 대장을 맡은 이후에는 비교적 적은 병력으로 일본 침략군과 친일 무리를 응징했다. 하지만 국내의 의병들은 해체되거나 만주로 떠나, 황해도에서는 이진룡 평산의병부대만이 활약하고 있었고 일제는 현상금까지 걸고 선생의 체포에 전력을 다했다. 소규모 부대의 유격전으로 항전을 계속했지만, 국내 여건은 날이 갈수록 악화됐다. 그때 스승 유 인석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망명, 새로운 항전 기지를 찾아 북상하자 선생은 스승을 따라 연해주 로 건너가 새로운 항일의병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군자금과 신무기를 구한 뒤 다시 귀국했다. 강화된 무장을 갖춘 평산의병부대의 항일 무장투쟁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고 더욱 강렬하게 공 격을 휘몰아쳤다.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자금을 조달하고 다시 새로운 무기를 확보해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쉼 없는 항일의병 무장투쟁 전개 1910년 3월 3일, 평산의병부대는 경의선을 지나는 열차를 전복시킨다. 열차 전복사실의 급보를 받 아 출동한 일본군 부대 평산, 개성 연합수색대를 격퇴시켰다. 그 후에도 지속해서 철로 파괴를 시도 해 평산 주재 헌병은 철도경비를 전담해 병력을 분산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무장투쟁은 군사상의 약점과 여러 조건으로 그 한계에 부딪혀 점차 항전의 기세가 위축되어 갔다. 한편 연해주로 망명한 유인석은 연해주 각지에 분산되어있는 의병세 력을 통합, 단일 군단을 이룩한 십삼도의군을 편성했고 이진룡 선생도 여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의군이 편성되어 활동하기도 전에 나라가 망하자 십산도의군도 해산했고 결국 이진룡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