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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선생은 각지를 돌며 고명한 학자들을 만나 학문과 시대를 이야기했다. 그중에서도 연재 송병선, 면암 최익현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선생은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孝) 보 다는 국가를 위한 충(忠)을 우선살해야 한다는 송병선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다. 마이산에 울려 퍼진 의병의 함성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로 전국 각 지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의병이 일어서자 선생은 태인의병에 가담하려 했지만 약 열흘 만에 해산했고 최익현과 임병찬 등 은 잡혀가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독자 적으로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굳혔다. 1906년 가을부터 1년 동안 의병을 일 으킬 준비를 하고 1907년 8월 하순 아버 지께 하직인사를 올렸다. 선생은 만약을 대비해 가족들을 여러 곳에 나누어 피신 시키고 가산을 정리했다. 마침내 1907년 음력 9월 12일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선생은 의병장 에 추대됐다. 기삼연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해 전라남도 후기 의병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면 전라 북도에서의 그러한 역할은 이석용 선생이 담당했다. 선생이 세운 호남창의소는 임실을 비롯한 전라북도 동부지역에 거주하는 가난한 유생들이 지휘부 를 구성했고 병사는 주로 농민과 일부 천민으로 구성됐다. 창의동맹단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주위 산 봉우리마다 파수를 세우고 고천제를 지냈는데 인근 주민과 장정 등 1천여 명이 집결해 일본군조차 섣불리 행동하지 못했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나선 의병활동 이석용 선생은 의병을 결성한 다음 날 진안읍을 공격해 헌병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점령하여 파 괴했으며 일본 상품을 불사르고 통신망을 사용할 수 없도록 전선을 끊었다. 아울러 일진회원 스스로 사무소의 깃발을 내리게 했다. 첫 번째 출진으로 커다란 성과를 거두자 이석용 의진의 명성이 전라북도 지방에 곧바로 퍼졌다. 며칠 후 김동신의 의병부대가 부대를 합치자고 요구했다. 지휘권 문제로 의견 충돌이 있던 중 일본 이석용 선생이 의병을 일으킨 마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