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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아, 프랑스, 독일 등의 삼국간섭으로 일제는 청나라로부터 받은 요동반도를 반환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약점을 간파한 민씨 세력은 러시아를 이용해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는 계획을 추진 했다. 일제는 이를 막기 위해 일본 배척의 핵심인물인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친일정권을 통해 황후의 자격을 박탈하는 폐서인 조치를 내리게 한다. 선생은 일제의 명성황후 살해와 일제의 사주 아래 이루어진 왕후의 폐서인 조치를 규탄했다. 동시 에 선생은 왕후의 위호를 우선 복위시킨 뒤, 일제의 만행을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고 동맹국들과 함 께 일제를 쳐 국모의 원수를 갚자고 주장했다. 항일 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의병을 뒤에서 지원 그해 11월 15일 소위 을미개혁의 하나로 단발령 을 내리자 선생은 영흥부사의 직을 사퇴하고 충남 예산으로 갔다. 이후 안동부 관찰사, 중추원 의관, 비서원승, 궁내부 특진관, 함경남북도 안렴사 등에 임명됐으나 전부 거절해 일제와는 같이 일할 수 없 다는 뜻을 보였다. 일제는 러일전쟁 승전 직후 마침내 을사늑약을 체결해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했다. 나라가 망해 가는 상황이 되자 선생은 청토적소란 상소를 올려 매국노의 처단과 일제와의 일대 격전을 주장했다. 투철한 반일 민족의식을 토대로 지속 전개된 상소 투쟁은 사람들에게 선생을 항일운동의 상징적 존 재로 받아들이게 했다. 위정척사 유림의 신망을 한몸에 받은 선생은 최 익현으로부터 의병 동참을 부탁받게 된다. 부탁을 거절하고 의병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전 참판 민종 식이 충남 홍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탈환하자 선생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민종식 의병장 이 패한 후 선생은 그를 숨겨주고 뒤에서 많은 도움을 줬다. 이에 일제는 이남규 선생을 없애야겠다는 마음을 품는다. 1907년에 광무황제 퇴위와 군대해산으 로 인해 다시 의병이 일어나자 선생이 구심점이 될까 염려했다. 1907년 9월 26일 선생의 집을 포위 하고 회유하려 했지만 회유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칼로 선생을 죽이고 만다. 이남규 선생의 글(1896) 이남규 선생의 시(1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