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page
18 2024년 12월 순국 특별 초대석 만나고 싶었습니다 민영백 ‘(주)민설계’ 회장(신규식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친 신창희(일명 신명호) 선생 관련 이야기를 들어보 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민회장은 사무실에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조선 후기 명문가 여흥 민씨 ‘삼방파’ 문중 민영백 회장은 여흥 민씨 명문가, 특히 유명한 인 물을 대거 배출한 ‘삼방파(三房派)’출신으로도 유명 하지만, 독립운동가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그는 오랫동안 건축설계 사업에 종사하며 전문가로 자수성가하여 명성을 떨치고, 특히 건축업계에서 두 각을 나타냈다. 오래 전인 1970년 ‘민설계’사무소를 설립했고, 1991~1992년 한국실내건축가협회 회장, 1998~2001년 코리아디자인센터 건축부문 자문위 원, 2003년 10월 대한민국 실내건축대전 일반공모 전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2003년 11월 서울 세계베스트디자인 자문위원, 2008년 서울디자인올 림픽2008 조직위원을 맡았다. 또 그동안 대통령표 창(청와대 춘추관 설계, 1989년), 문화체육부 환경문 화대상 실내디자인상(로툰다 홀, 1995년), 한국건 축 가협회상 대상(성북빌하우스, 1998년), 아시아태평 양 듀폰 앤트론디자인상 대상(제일은행, 2003년) 등 많은 상도 받았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왜 건축설 계 관련 일을 평생의 일, 사업이나 ‘업(業)’으로 삼게 되었는지 그 배경이 궁금했다. “저희 집안이 명색이 여흥 민씨 명문가, 독립운동 가 집안이라고 하지만, 사실 남은 재산이 거의 없습 니다. 선친께서 일찍이 중국 상해에 망명하셔서 독 립운동에 종사하셨고, 모친 또한 1919년 상해에 오 셔서 외조부님을 도와 독립운동을 하시느라고 매우 어렵게 사셨죠. 또 선친께서 1949년 5월에야 뒤늦게 귀국하셨는데, 6월에 바로 김구 선생이 암살되는 충 격적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 때문에 아버님은 국내 에 계시지 못하고 이 해 8월 초대 대만(臺灣) 총영사 로 나가게 되셨죠. 저도 아버님을 따라 대만에 가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57년 7월 귀국했습니다. 어 노년기의 민필호 선생(국가보훈 부 제공)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편저로 발간한 『석린 민필호 전』(나남출 판, 1995) 일제 패망 이후인 1946년 중국 남경(南京)에서 민회장(가운데)과 기념촬영한 신창희(왼쪽) · 민필호 내외(민영백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