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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연재 송병선과 입재 송근수 문하 에 드나들면서 학문을 연마했다. 1895년 10월 일제는 명성황후 를 살해하고 뒤이어 을미개혁의 하나로 단발령을 강제 시행했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국모의 원수 를 갚고, 국왕을 보위하며, 성리 학적 사회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1896년 2월 19일 경상남도 안의 에서 서재기, 정도현, 박준필, 최 두원, 최두연, 임경희, 성경호 등 의 지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곧바로 경상남도의 행정 중심지이자 요충지인 진주로 진격해 새벽에 진주성을 탈환했다. 선생의 의병이 진주성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진주부민들 또한 봉기해 정한용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성 밖에 진을 쳤다. 일제의 침략 거점인 부산 개항장 공략 개시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의병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해 진주의병진의 규모는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노응규 선생을 총대장으로 하는 진주의병진은 진주성을 거점으로 삼아 인근의 여러 지역을 장악하 면서 활동영역을 넓혀 갔다. 선생은 2월 27일 선봉장 서재기를 파견하여 단성을 장악하게 하였고, 뒤이어 하동, 고성, 함안 등 으로 세력을 뻗쳤다. 대구로 도망가 있던 경무관 김세진이 대구진위대 병사들과 일본군을 이끌고 공 격해 오자 이를 두 차례에 걸쳐 격퇴했다. 진주의병진은 일제 침략의 거점인 부산 개항장을 공격하 기로 결정한다. 부산 공략을 위해 먼저 부산 옆의 김해를 장악했다. 4월 11일 김해에서 구포로 건너가는 선암 나루터에 집결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김해로 귀환 하기로 했다. 다음날 일본군 수비대가 증원군을 파견해 공격해 오자 창원 방면으로 일시 퇴각했다가 김해에서 구포로 돌아가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해 적군 4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진 주의병진도 4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입어 부산진공 계획을 포기하고 진주로 돌아갈 수밖 에 없었다. 노응규 의병이 주둔한 진주성 선화당 터, 지휘소를 설치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