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page

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71 대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1907년 10월 29일 고창 문수사에서 선봉장 김태원이 거느린 의병부대가 일본군을 격파하고, 주민 들로부터 군량 등 군수물자를 지원받아 영광 법성포로 나갔다. 법성포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경찰주 재소와 우편취급소, 상점 등도 갖추어진 곳이었다. 12월 7일, 영광 법성포를 공격해 일본인 건물을 불태우고 곡식을 주민들에게 나누고, 일부는 군량미로 노획했다. 금성산성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 기삼연 선생이 지휘하는 호남 창의회맹소 의병부대가 장성, 고 창, 영광 등지에서 기세를 떨치 게 되자, 일본군 광주수비대는 병력을 총동원해 1908년 1월 24 일부터 의병부대를 추적하기 시 작했다. 선생의 의병부대가 금성에 도 착하여 대오(隊伍)를 정비하던 중, 담양 주둔 일본 군경이 습격했다. 이에 선생의 의병부대는 이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지만, 30여 명의 의병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당했다. 참패를 당한 선생의 의병부대는 복흥산에 숨 었다. 군수품도 모자라고 혹한으로 항전이 곤란해지자 선생은 의병들을 귀향시키고 정월 보름에 다시 집결하도록 했다. 선생 은 그 부근에 살던 기구연의 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으나 일본 군에게 발각돼 설날 아침에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김태원은 사람들을 이끌고 일본 군을 추격했다. 곧바로 광주로 호송된 선생은 다음날인 1908년 음력 1월 2일, 일제는 선생을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사살했다. 선생이 구출되어 다시 의병 활동을 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 이었다. 기삼연 선생은 58세를 일기로 순국하고 말았다. 호남창의회맹소 전투지 - 금성산성 기삼연 선생 체포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