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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칼럼 • ‘명예로운 휴전(Honorable Armistice)’과 정전협정 17 미국 행정부 는 국 가 안 전 보 장 회 의 에 서 6·25전쟁을 군 사적 수단과 별 개로 정치적 협 상으로 종결시 킬 정 책 ( N S C 48/5)을 확정하 였다. 즉, 한반 도의 통일·독립 국가를 수립하 는 것은 유엔을 통해서 최종적 으로 해결하고 현 상황에서는 38선이 확보되는 선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하 고, 외국군을 철수시키되, 북한의 남침 재발에 대비하여 한국군의 전력을 증강한다는 내용이 요지이다. 결국 전(前) 주소(駐蘇) 미국대사였던 조지 케난(George Kennan)이 나서 당시 유엔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와 비밀리에 접촉하여 휴 전문제를 협의했다. 말리크는 1951년 6월 23 일 유엔본부의 라디오 방송 「Price of Peace」 에 나와 교전 당사자 간의 대화가 필요함을 언 급하며 휴전회담 필요성에 대해 동의했고, 이 에 대해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Matthew B.Ridgway)는 휴전회담을 제안으로써 6 · 25전 쟁은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 4단계: 예비회담 시작부터 휴전회담 체결까지 6월 30일 리지웨이는 서울과 도쿄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휴전을 위한 군사회담 개최 장소 로 원산항에 정박 중인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 디아호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공산군 측 은 7월 1일 북경방송을 통해 유엔군 사령관의 협상 제의를 수락하면서 회담 장소를 38선 부 근의 개성에서 7월 10일에서 15일 사이에 회 담을 열 것을 제의했다. 공산군이 회담 장소로 제안했던 개성은 38선 남쪽에 있었다. 양측 모 두 이곳을 점령하지 못한 상태였으나 공산군 측이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개성을 휴 전회담 장소로 받아들인 것은 유엔군이 범한 실수로 이후 여러 불이익과 불편을 초래함으로 1950. 7. 27. 10시 판문점.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유엔측 미국 육군중장 해리슨, 공산군측 북한군 대 장 남일(출처 : National Museum of the United States Air Force) 1953.7.27.22시 평양.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북한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WIKIMEDIA COMMONS) 1950년 7. 27. 13시 유엔기지 문산 극장. 유엔군 총 사령관 클라크가 서명하고 있다(출처 : WIKIMEDIA COMMONS). 1953.7.28. 9시30분 개성.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