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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칼럼 ➊ • ‘의병의 날’ 단상: 의병 - 독립군 - 광복군 - 국군 창설과정과 그 의미 17 였다. 의병들의 항전은 일본군 의 국내 ‘토벌’과 한일강제 병합으로 중단된 것이 아니 라,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 과 독립전쟁으로 연속된 것 이다. 을미의병 당시 제천 의병을 이끌었던 유인석이 연해주에서 국내외 의병세 력의 통합을 표방하여 결성한 13도의군은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뒤이어 경성(鏡城)의 병, 홍범도를 비롯한 관북의 신포수의병 등 많 은 의병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으 로 전환하거나 독립군 단체에 가담하였다. 독 립군의 간부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의 핵심 인 물 다수가 의병 출신이었다. 1920년 청산리대 첩 직후 대한독립군단의 총사령이었던 구한국 군 시위대 부교(副校) 출신인 김규식(金奎植)은 일찍이 철원, 연천 등 경기북부의 해산 군인들 을 규합하여 항일의병 투쟁을 벌였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항일무장투쟁은 일제의 패망 때까지 의병 – 독립군 – 광복군으로 지속 되었다. 이후 한국광복군은 우리 국군 창설에 서도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미군정 당시 통위 부(국방부의 전신, 1946년 국방부로 개칭)장 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참모총장 유동열이 맡았 으며, 1948년 출범한 국방부 초대장관은 신흥 무관학교와 광복군 출신 송호성이 맡았고 해군 역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손정도의 아들 손원일에 의해 주도적으로 창설되었다. 공군 또한 그 뿌리를 윌로우즈 한인비행학교에 두고 있다. 이와 같이 대한제국 해산군인과 의 병에서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이어졌던 명맥은 마침내 광복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군대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의병 - 독립군 - 광복군 - 국 군으로 연계되는 주요 흐름과 그 의미, 시사점 을 깊이 반추해야 할 것이다.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최충헌 정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 다. 육사 사학과 교수, 세종대 역사학과 겸임교수, 서강대·경기대대학원  사학과 강사를 역임하였다. 전쟁기념관에서 28년간 근무하면서 학예부 장 재직시 해외 선진 박물관들을 조사하여 상설전시실을 현재 모습으로  개선하였다. 최근 부천시박물관 관장을 지냈으며, 현재 월간 『순국』 편 집위원을 맡고 있다. 『한민족전쟁사총론』,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나』,  『나라를 지켜낸 무기와 무예』, 『고려의 후삼국통합과정과 나주』, 『어재 연 장군과 신미양요 연구』 , 『국외 소재 19세기 조선의 군사유물 연구』  등의 저서(공저)를 펴냈다. 필자 김대중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립 전례식 직후 기념촬영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한국광복군 참모장 시절의 이 범석(이상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