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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가 되었고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은 2남을 두니 휘 덕부 원부(諱 德符 元符)로 이 형제(兄弟)분께서 벌열(閥閱)의 문(門)을 열으시었다. 정안공 휘 덕부(定安公 諱 德符)는 문무겸전(文武兼全)으로 대명외교(對明外交)와 왜구토벌(倭寇討伐)에 공(功)을 세워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군(封君)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 청성백(靑城伯)에 봉(封)해졌고 정종조(定宗朝)에는 좌정승(左政丞)에 올라 경륜(經綸)을 폈다. 공(公)이 7남을 두니 1남은 인봉(仁鳳)으로 도총제(都摠制)요 2남은 의구(義龜)로 판사(判事)이다 3남은 계년(繼年)으로 지성주사(知成州事)이고 4남은 징(澄)으로 인수부윤(仁壽府尹)이다 5남은 온(溫)으로 영의정(領議政)이며 세종국구(世宗國舅)로 시호(諡號)가 안효(安孝)이고 6남은 종(淙)으로 태조대왕(太祖大王)의 2녀 경선공주(慶善公主)를 맞아 부마도위(駙馬都尉) 청원군(靑原君)이요 7남은 정 으로 동지총제(同知摠制)이다 전리판서공 휘 원부 호 악은(典理判書公 諱 元符 號 岳隱)은 판서(判書)의 지위(地位)에 올랐으나 고려조(高麗朝)가 종언(終焉)을 고(告)하자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켰다. 공(公)이 세분의 아드님을 두니 1남은 천윤(天潤)으로 영동정(令同正)이요 2남은 천주(天柱)로 현령(縣令)이며 셋째가 천식(天湜)이다. 그 외(外) 자손(子孫)들도 모두가 동량지재(棟樑之材)였고 계계승승(繼繼承承) 잠영세족(簪纓世族)이 되어 국가(國家)를 이끌었다. 청성백(靑城伯)의 5남 휘 온(諱 溫)의 따님이 세종대왕비 소헌왕후(世宗大王妃 昭憲王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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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부왕 태종(太宗)의 외척억제정책(外戚抑制政策)에 멸문지경(滅門地境)에 이르렀으나 왕후의 영민(穎敏)과 공덕에 힘입어 위기에서 비켜날 수 있었다. 이후(爾後)로 청송심씨(靑松沈氏)는 동국10대벌족(東國十大閥族)으로 명예와 번성을 누렸다. 혈족 총가구수는 우리나라 256성(姓)중 31순위지만 명현달사(名賢達士)가 울연(蔚然)히 배출(輩出)하여 정계추요(政界樞要)의 각신(閣臣)으로 혹(或)은 노사숙유(老師宿儒)로 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13상신 2문형 3왕후 4부마(十三相臣 二文衡 三王后 四駙馬)에 상신(相臣)중에도 영의정이 9명으로 전주이씨 11명에 이어 두 번째이며 내리 3대정승을 지내기도 했다. 대과급제(大科及第)가 196명이고 무과급제(武科及第)는 350여명 공신책록(功臣策錄)이 현재 알려진 것만 400여명이니 더 할 수 없는 영예다. 역경에 착한 일을 쌓은 가문에는 반드시 경사 러움이 있다했거니와 오늘 이 시대를 사는 후손들도 중추적인 역할로 각계에서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대종회에서는 위선사업(爲先事業)도 돈독하게 펄쳐 전국 5처(五處)의 조선산소(祖先山所)를 수호하고 제향(祭享)을 받들며 현조(顯祖) 묘소정화사업을 계속하는 한편 11회째로 대동보편찬이 완료되었다. 이런 일들은 모두 대종회가 주도하고 있으며 1971년에 기왕의 조직을 확대재편해서 초대(初代) 심성택회장이 진력했고 2대 심명구회장에 이르러서는 대종회종무소로 찬경회관(讚慶會館)을 마련하고 종보(宗報)를 발간하는 등 다채(多彩)로운 사업(事業)을 전개수행하고 있다. 아쉬운 바는 국토가 양단된 민족적 불행으로 북녘땅을 세거지로 한 2세조 봉익공(二世祖 奉翊公)의 예손(裔孫)들을 비롯한 동종(同宗)들과 소통을 하지 못하는 바라하겠다. 여기 여명의 땅 靑松沈氏 상조(上祖)의 영기(靈氣)가 깃든 보금자리 보광산(普光山) 시조묘전(始祖墓前)에 종인일동의 성심을 모아 글을 올리고자 기나긴 역사의 발자취를 뒤돌아보며 돌 하나를 다듬어 세우면서 不佞(불녕)에게 글을 청하니 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