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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진(鄭錫珍)은 1896년 전남 해남군수(海南郡守)로서 기우만(奇宇萬) 등과 함께 나주의진(羅州義陣)의 거의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라도 장성과 나주의 양반유생들도 창의를 준비하였다. 1896년 정월 일어난 장성의병(長城義兵)은 송사(松沙) 기우만과 그의 문인들이 주도하였다. 이어서 정월 29일 기우만의 격문이 나주에 도착하여 나주의 양반 유생들과 향리들이 적극 호응하였다. 나주향교에 집합한 양반 유생들과 향리들은 전주에서 이학상(李鶴相)을 의병장에 추대하고, 100여 명으로 대오를 편성하였다. 나주의진을 주도한 양반 유생은 의병장 이학상 등이었고, 향리들은 정석진 등이었는데, 의병진의 주도권을 장악한 향리들은 연리청(掾吏廳)에 창의소를 설치하였다. 나주의병은 음력 2월 초에 시작하여 약 한 달여 정도 활동하였다.
정석진은 당시 해남군수로 나주향교의 유생들에게 창의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즉 정월 초5일 정석진은 향교에서 말하기를 '본 고을은 500년 문명의 고장으로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여 거의의 일이 늦었으니, 의당 의병을 모집하여 하루 빨리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아야 하며, 성패를 미리 따지고 관망만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음력 2월 9일 해남군수로 부임하면서 의병장 이학상 등을 만나 '급한 일이 있으면 밤중에라도 달려 오겠다'고 하는 등 매우 적극적이었다. 정석진은 의병이 해산한 후 가장 먼저 체포되어 효수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부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