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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67 있었으나 비리와 부정이 가득한 과거장의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해 그대로 귀향하고 말았다. 고광순 선생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국사를 그르친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 히고 나라를 망치는 왜적을 빨리 무찔러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을미사변의 원흉들을 단죄할 것을 통렬하게 주창했다. 을미사변으로 호남의 유림인사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다 을미사변에 뒤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사람들 사이에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커졌고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고광순은 호남지 방 유림계의 명사들인 송사 기우만, 성재 기삼연 등과 연락을 취하며 각 고을로 격문을 보내 의병 규합에 나섰다. 1896년 2월(음) 광주와 나주 등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의병에 속 속 참가했다. 기우만을 주축으로 광주향교에 집결해 규칙을 정하고 앞으로의 전략을 논의했다. 기삼연도 이때 3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광주로 합세했다. 하지만 영남지역의 의병을 격파한 여세를 몰고 호남으로 행군해 온 이겸제가 거느린 관군의 공격 을 받아 의병 측에 가담한 해남군수 정석진이 희생됐고 선유사 신기선이 해산 칙령을 가지고 오자 의병들은 더 이상 항거할 명분을 잃고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국왕의 명령인지라 의병을 해산하기는 했지만, 그 명이 국왕의 본심이 아니고 일제와 매국대신의 협박 때문에 내려진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고광순과 기우만 등의 선비들은 전국 각지를 돌며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광무황제로부터 애통조를 받고 복수를 다짐하다 고광순 선생은 의병을 일으킨 이후 집안일은 접어둔 채 오직 의병을 재기하겠다는 일념으로 밤낮 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선생의 나이 58세 때인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식 민지화에 박차를 가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그 일로 다시 전국에서 항일 투지가 크게 불타올랐으며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1906년 6 월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일어난 최익현 의병이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광순은 고제량과 함께 여기에 동참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이미 출동한 진위대에 의해 최익현은 체 포당하고 의진이 해산된 뒤였다. 고광순 선생은 그해 11월에 다시 백낙구, 기우만 등과 함께 구례의 중대사(中大寺)에 모여 각지의 군사들을 모아 11월 6일 순천읍을 공략하기로 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날 모인 사람이 얼마 고광순 의병장이 사용하던 ‘불원복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