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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65 사금 5만 냥, 전 참찬 허위 등 동료들의 모금 2만 냥을 확보했다. 그 돈으로 정환직은 청나라 사람 왕 심정을 통해 양식총 500정과 기타 군수품을 구입하기로 한다. 1906년 3월 정용기는 영천에서 산남의진을 결성했다. 삼남의진은 처음부터 목표가 서울진공작전 이었기에 지역부대에게 강원도 오대산에서 회합하자고 연락하고 북상을 시작했다. 서울에 있던 정 환직 선생은 직접 모집한 의병 100명을 강릉 남쪽의 금광평으로 보내 산남의진을 맞이할 준비를 했 다. 하지만 정용기는 신돌석의병진이 영해에서 토벌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돕기 위해 수백 명의 병력으로 영해를 향해 진군했다가 사로잡히고 만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석방은 되었으나 서울 진공작전은 미뤄지게 된다. 결국 서울에 입성하지 못하고… 영천으로 돌아온 정용기는 1907 년 초여름부터 다시 의병투쟁을 재개한다. 영해, 청하, 청송, 포항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 만, 북상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정환직 선생은 서울진공작전을 실 행하기 위해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한다. 9월 1일 산남의진은 입암을 공 격했으나 일본군의 역습으로 대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중군장 이한 구, 참모장 손영각 등 수십 명의 장령들이 전사하는 참변을 당했다. 입암전투에서 참패한 산남의진 은 정환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새로 만드는 수준으로 재편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재건한 산남의진은 청송 보현산 일대와 영일 동대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증파된 일본 군이 안강, 기계 등 동해안 일대에서 기습전을 전개했고, 그 때문에 의병진의 탄약과 장비의 소진은 심 각한 상황이었다. 정환직은 관동 진출을 위한 최후의 방책으로 진용을 분산하여 북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정 환직 선생은 11월 6일 청하면 각전에서 일본군에게 잡히고 만다. 일제는 귀순할 것을 권유했으나 선생 은 끝내 거부했고 영천으로 돌아오던 중 남쪽 교외에서 1907년 11월 16일 총살, 순절하였다. 정환직 선생과 그의 장자 정용기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묘 근처에 세운 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