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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부지방에 삼남참오령으로 파견되어 토벌작전에 참여했다. 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군무대신 조희연과 동행하여 청일양군의 전투를 직접 관전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내각재편과 내정개혁을 진행하자 각지의 동학농민이 항일구국을 표 방하며 봉기가 일어난다. 이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군 토벌에 일본군의 개입을 허락했으나 정환직 은 ‘일병의뢰반대상소’를 올려 일본군의 개입을 반대하지만 조정은 선생을 선유사겸토포사로 임명해 황해도의 동학농민군 진압을 명령한다. 광무황제의 명을 받아 의병을 일으키러 떠나다 1895년 정월 정환직 선생은 진주에서 을미사변의 소식을 듣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은거했다. 이듬 해에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고 아관파천으로 전 국민의 반일감정은 한층 높아졌다. 1897년 8 월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선생은 시종관에 임명돼 다시 관직에 나오게 된다. 그 후 삼남시찰사, 삼남도찰사 등 남부 지방을 담당하면서 부정을 뿌리 뽑는 깐깐한 관리로 광무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1901년 11월 20일 밤 종묘에서 불이 났을 때 황제와 태자를 피신케 한 공로로 이름과 자호(字號)를 하사받아 이름을 정치우에서 정환직으로 바꿨다. 관직에 있던 그가 의병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것은 1905년이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광무황제는 선생에게 “경(卿)이 화천(華泉)의 물(水)을 아는가. 짐망(朕望)하노라” 밀지를 내렸고 선 생은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게 된다. 1905년 12월 30일 고종의 밀지를 받은 정환직은 관직을 사퇴 한다. 큰아들 정용기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이라 이야기하고 고향으로 떠나려 했다. 정용기는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해서 부자는 같이 의병을 일으키기로 한다. 서울진공을 위해 세운 산남의진 큰아들 정용기는 영남지방으로 내려가 의병을 모집 하고 무기를 수집하여 의병을 일으켜 강원도를 거쳐 서울에서 합류하는 진공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13도창의병이 실현하려 했던 서울진공작전의 모체가 됐다. 1906년 1월 아들 정용기는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선생은 영남 일대를 순회하며 동지를 모 으고 이한구와 함께 1월말 서울로 돌아왔다. 정환직 선생은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군자금으로 고종의 하 정환직 선생 순국지 및 산남의진비.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경 상북도 영천에서 조직된 항일의병부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