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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정면 대결은 힘들어 소규모의 병력으로 공격하는 게릴 라식 전법을 사용했다. 또 밀정에 의해 의병진의 위치가 파악되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하여 의병들이 있는 곳에서는 마을 어귀에 파수 를 세우고 종사원들에게 줄을 세워 계속 말을 전달하게 하는 연환식 전달제도를 운용했다. 훈련이 부족한 의 병, 빈약한 무기와 군수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유격전을 수행하면서 호남 중서부 지방 을 장악할 수 있었다. 대동창의단의 활동이 활발해질 무렵인 1908년 겨울, 호남의병장들이 여러 차례 상의한 끝에 호남동의단을 조직하고 선생을 의병대장으로 선출했다. 이 호남동의 단의 의병장들이 활동했던 지역은 전라도 전역이었고 선생은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활동했다. 전해 산 선생은 호남지역에서 의진을 규합하여 일군과 투쟁 을 벌이는 한편 포악한 관리, 일진회원, 헌병보조원 등의 횡포를 징계하고 가짜의병을 처단했다.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로 활동하다 전해산 선생의 활동을 막기 위해 일제는 몇 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의병을 ‘토벌’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의병들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영광 오동과 덕흥 전투에서의 연패로 수많은 사 상자를 내고 겨우 탈출했으나 의병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져 전투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최후의 방편으로 만주로 떠나자고 했으나 부하들 중에 동의하는 자가 없었다. 게다가 순종황제의 의병 해산령이 내려오자 영광 오동촌에서 부대의 지휘권을 박영근에게 넘겨주고 의병부 대를 떠났다. 그 후 전해산 선생은 남원 고래산에서 서당을 열었다. 하지만 같이 의병으로 활동하던 조두환이 일제가 내건 현상금에 눈이 멀어 선생을 밀고했다. 수십 명의 일본 경찰에게 둘러싸인 선생은 가족 을 만나고 싶다 요청하고 가족들에게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며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은 후 대구 감옥소에 이감되어 대구공소원과 고 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고 말았다. 7월 18일(음) 교수형으로 순국한 선생을 따라 부인이 자결 했고 쌍상여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전해산 선생의 진중일기. 일본 의 침략에 항거한 구한말 의병 들의 투쟁 모습을 잘 보여주는 기록 중 하나로 손꼽힌다. 전해산 의병장 작전지도로 만든 병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