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page
16page
나섰다. 의주에 도착한 양장이 압록강 늪지 도하작전을 꾀하려 군졸을 위화도에 머물게하고 전열을 다듬고 있을때, 여름철 우기가 닥쳐 이성계장군이 조민수 장군과 같이 전군을 육지 의주로 이동작전을 마치고나니 때마침 내린 호우가 위화도섬을 휩쓸고 말았다. 이떄 군졸이 육지철수를 지체하였던들 십만대군은 일시에 수장 고혼이 될뻔하였으니 두장군 휘하 군졸들은 그로부터 육지철수를 주도한 이성계장군을 생명의 은인이고 하늘이 낸 용장이라 감탄하며, 오직 그를 따랐다. 요동정벌을 반대한 이성계장군은 회군을 상소하니 왕과 최영은 왕명을 거역한다하고 이성계 조민수 두장군을 역적으로 몰아 이때 두장군이 회군을 결심하고 전군을 이끌고 도성으로 향할때 후방 최영군간에 내전이 벌어지고 회군단은 평양을 거쳐 개경도성에 입성하니 도성군을 지키던 군졸과 중신관료들은 모두 피신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이와같이 내외 전란에 시달린 고려조는 이내 쇠망하니 민심은 공양왕조의 중신 이성계장군과 문하찬성 정몽주로 양분되고 양자간에 대권 다툼이 벌어졌다. 정몽주가 이성계를 제거하려 할때 이성계장군 세력이 선수를 쳐 정몽주는 성내 선죽교에서 살해된후 고려조의 대소신료들이 이성계장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여 1392년 7월 17일 송도성주 창궁에서 새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이태조가 조선을 개국한 후 새나라 국정을 펴려는데 인재가 모자라 고려말 사직에 몸담았던 관료들을 등용하려 온 나라를 찾으니 이들이 개풍광덕산 두문동과 이곳 청계산에 피신 은거하고 있어 특사 朴葳(박위)등을 보내 사직에 복귀하라는 왕명을 전갈하였으나 누구하나 응하는 자가 없었다.
16page
상심한 태조임금은 이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도성을 떠나 과천을 거쳐 청계산에 은거한 요신들을 만나 사직에 복귀하기를 권했으나 하나같이 하는 말이 「한 몸으로 두 임금을 섬김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옵니다」하며 따르는 자가 없었다. 임금은 이들의 충절의지를 칭찬하고 환궁하고 말았다. 이곳은 이태조 임금이 청계산 행차시 잠시 쉬려 초당이 세워졌던 곳이라 하나, 임금이 아랫사람을 찾아 위험을 안고 산중에 오를리 없으니 초당은 요신들을 만나 접견장소로 추정된다. 고려말 중신관료들이 청계산에 은거한 후 산중턱과 기슭에 오십여 호가 넘는 민가가 생겨나고 정상을 제외한 산지에 화전을 일구어 살았다. 청계산이 망경대 혈읍(血泣)재 국사봉 장좌봉으로 이름이 붙고 절골, 물방아골, 사기점골, 점말(기와 절오지 그릇 도요지) 독가막골 장승백이 등 많은 사적지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