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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2024년 7월 Column 편집위원 칼럼 작은 소리 큰 울림 대사 켈리(Sir David Kelly)가 소련 측에 한국 사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을 타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중립국이었던 인도는 개전 초기부 터 양측에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중재자 역할을 했고, 아랍 13개국과 함께 1950년 12월 12일 유엔정치위원회에 한국전쟁 정전안과 정전3인 위원회 설치안을 정식 제출했으나 공산군은 거 부했다. 이처럼 유엔 내에서의 휴전 논의는 실 질적인 성과를 도출해 내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지만, 이후 본격적인 휴전협상이 진행되었 을 때 방향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2단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유엔군이 38선 을 돌파하여 북진하는 시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완전히 바 뀌자 유엔군은 북진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스 탈린은 유엔의 소련 대표 말리크(Jacob Malik) 를 통해 즉각적인 휴전안을 10월 2일 유엔에 제출하도록 했다. 이 결의안의 골자는 38선에 서의 적대행위 중지와 외국군대 철수 및 유엔 감시단 하의 한반도 전체 총선거 시행이었다. 그러나 서방국가들은 이 제안을 유엔군을 일시 저지시키려는 소련의 술책으로 보고 부결시켰 다. 10월 5일에는 네덜란드 유엔 대표가, 11월 엔 호주의 유엔 대표 케이드(Sir Keith Officer) 와 페루의 유엔 대표도 휴전을 제안했고, 특히 영국의 베빈(Ernest Bevin) 외상은 완충 지역 (Buffer Zone) 안을 미국과 중국에 제안했다. 완충 지역이란 평안북도 정주와 영원과 흥남을 잇는 선, 즉 유엔라인(북위 40도, 약 100마일, 동서를 잇는 최단 거리로 ‘Neck of Korea’ 라 고도 부름)부터 만주-시베리아-한국 국경선까 지의 비무장지대로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를 전 제로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맥아더의 크리 스마스 공세가 준비 중이었고, 중국 측 또한 1 차 공세로 자신감을 얻었기에 양측으로부터 외 면당했다. ● 3단계: 중국군의 참전 이후 ‘명예로운 휴전’이 공식적으로 나온 시기 1951년 4월과 5월 중국군의 춘계공세 이후 6월에 접어들면서 유엔군과 공산군 모두 무력 으로는 전쟁을 종결할 수 없다는 인식과 함께 정치적으로 해결을 하고자 ‘명예로운 휴전’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시작했다. 2) 미국은 전선을 중국으로 확대하지 않고 지상에서는 캔자스선 (임진강 하구에서 대략 38선 북방 20km를 연 결하는 선, 임진강 하구-문산-연천-화천-양양 까지)과 와이오밍선(임진강 하구에서 대략 38 선 40km를 연결하는 선, 임진강 하구-연천-철 원-김화-금성과 화천 중간-간성을 잇는 동서 구간)에서의 제한전쟁 정책을 고수하고 휴전을 위한 다각도의 외교정책을 펼쳤다. 2) “Honorable Armistice”는 미 외교문서인 FRUS(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년~1953년 정전협정까지의 문서 중 18건에 서 언급되었고, 미 합동참모본부 『The History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Vol. III 1951-1953, The Koran War Part 2』p.30, p.32, p.163, p.179, p.221에서 언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