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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2024년 6월 Column 편집위원 칼럼 ① 작은 소리 큰 울림 부터 시작된 항전은 원주·강화 등 지방 진위대 로 확대되었다. 이어 12월 전국의 13도 창의대 는 연합의진인 13도창의대진소를 창설해 동대 문 밖에서 진공작전을 펼쳤다. 각처에서 일본 인이 살해되고, 군아·면사무소·경찰분파소·우 체국 등이 파괴되었다. 의병진은 군인들의 참 여로 무기와 병력이 크게 강화되었고 전술도 발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내에서의 의병 활 동이 어려워지자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 어 만주·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독립 군이 되었다. 유인석은 1908년 문인 70여 명 을 이끌고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부대를 정비 하였다. 홍범도와 이진룡도 연해주에서 이범 윤·안중근과 연합하였다. 이때 연해주에 모인 이범윤·유인석·이위종·최재형은 동의회(同義 會) 및 창의회(彰義會)를 열어 한인자치를 실현 하면서 무장독립투쟁을 벌였다. 이듬해 7월에 는 안중근·엄인섭을 중심으로 국내진공작전을 벌여 일본군과 격전을 치렀다. 1909년 안중근 은 11명의 동지 들과 단지동맹을 맺고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맹세 하였다. 같은 해 10월 26일 안중 근은 하얼빈역에 서 이토 히로부 미[伊藤博文]를 사살하였다. 유인석 · 이상설 · 이 범윤 등은 1910년 6월 러시아령 안의 여러 의 병 조직을 하나로 통합하여 13도의군을 조직, 무장투쟁을 도모하였다. 의병, 독립군 - 광복군 - 국군 창설로 이어져* 한말의 의병항쟁은 한국적 가치로서의 ‘의 (義)’가 우리 민족을 중심으로 주장되고 전개되 었다. 이러한 정신은 고스란히 일제강점기 항 일무장전쟁에 계승되었다. 한말 의병전쟁이 민 간의 자발적 참여로 ‘구국(救國)’을 목표로 전개 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1910년 경술국치 (庚戌國恥) 후에도 의병투쟁은 풍기광복단, 광 복회, 독립의군부 등의 활동을 함으로써 무장 독립전쟁의 토대를 구축해 나갔다. 뿐만 아니 라 1910년 8월 한일강제병합을 전후로 많은 의병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건너 간도와 연 해주로 망명하거나 이주하였다. 이들은 간도, 연해주를 새로운 항전기지로 삼고 부단히 전력 을 확충하면서 일제와의 또다른 전투를 준비하 * 이 과정은 전쟁기념관 ‘전쟁역사실’ I·II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20년 6월 독립군의 봉오동전투 승전 소식을 보도 한 『독립신문』 기사(1920.6.22) 1920년 10월 말 독립군의 청산리대첩 기록화(독립 기념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