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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사회과학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 출판사에서 글밥을 먹으며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을 다녔고요 . 김영사란 출판사에서 기획위원으로 있었지요 . 거기서 처음 대박을 낸 게 있습니다 . 창고에서 잠자던 원고를 가져와 사장과 부장 등 편집부 모든 구성원이 인문계 출신에 여성일 때 , “ ‘프렉탈’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으며 , 앞으로 이거 분명 뜰 수 있으니 출판 합시다”라고 설득한 책이 있어요 . 그렇게 해서 책을 인쇄하는 데 영화가 만들어 진다네요 . 정말 대박이었지요 . 이게 ‘주라기 공원’입니다 .( - _ - ;;). 저야 뭐 ... 주는 월급만 받았지만 말이죠 . 한 일 년을 월급 받으며 일 해 보니 재주 부리는 곰이 되어서 미래가 안 보이는 겁니다 . 마늘만 먹으면 뭐가 된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죠 . 프리랜서로 살면서 학업은 계속했습니다 . 대학원 졸업할 무렵엔 사회과학의 수준이 다행히 제게는 만만하게 여겨져 주목받는 논문 한 편을 쓸 수 있었습니다 . 이게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에 실리면서 정말 생각지도 않은 기자가 되어 갑니다 . 취직을 위한 시험공부를 한 적도 없고 , 기자가 뭘 먹고 사는지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 한 일 년 자유기고를 하다 보니 특채하겠노라고 ... ㅜㅜ . 물리학 전공자가 그래서 기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 ‘붙잡혀 간 남자’가 되어서 조선일보 신문밥을 7 년 정도 먹어 보니 대기업의 조직이 건강상 좋은 건 아닌 듯 했습니다 . “에혀 ~ 이 길도 아닌가벼 ~ ”하고 있을 때 한국갤럽조사연구소에서 전문위원으로 오라는 교섭이 왔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