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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시작한다. 하지만 유생이 주도가 된 의병의 전투력으로는 관군과 일본군을 당 해내기 어려웠고 1896년 여름 광무황제로부터 해산령이 내려지면서 이인영 선생은 의병을 해산하고 경상북도 문경 산중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제가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광무황제를 폐위 하자 전국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고 강제 해산된 대한제국군 출신이 속속 의병에 참여하면서 예전 의 의병전쟁과는 양상이 사뭇 달라졌다. 유생들로 조직되어 전투 경험이 부족해 고전을 면치 못했던 예전과 달리 해산군인들이 참여하면서 실전 능력이 상당히 올랐던 것이다. 병든 부친에게 작별인사한 후 관동창의군의 대장이 되다 이때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 2천여 명을 일으킨 이은찬, 이구채 등이 선생을 지휘자로 모시기 위해 찾아와 간곡히 권유하였으나 부친의 병이 깊을 때여서 쉽게 허락하지 못했다. 이은찬은 “이 천붕지 복(天崩地覆)의 날을 당하여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자의 은(恩)이 경한데 어찌 자자로서 공사를 미루 리오”라며 4일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선생의 결단을 촉구하자 1907년 7월 25일 선생은 마침내 이를 허락한다. 언제 돌아가실 줄 모르는 부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즉시 원주로 가 의병원수부를 설치 한 뒤 관동창의대장이 되었다. 이인영 선생은 곧 곳곳에 격문을 보내 “일제는 인류의 적이므로 분쇄해 조국의 국권을 찾자”고 호 소했고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도 통문을 보냈다. 특히 「고재상항동포(告在桑港同胞)」라고 쓰여진 격문은 1908년 3월 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저 격하는데 결정적인 동기가 됐다. 국내외에 배포된 격문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구국의지를 불태우게 했으며 사람들은 이 격문에 감 동해 의병에 참가했다. 선생은 이때부터 1907년 11월까지 원주, 철원 등 강원지역에서 38차례나 일 군과 교전했다. 13도 연합의병 총대장으로 서울진공 시도 이인영 선생은 지방에서 일군과 싸워도 서울을 장악하고 있는 일제를 몰아내지 않으면 국권회복 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때 이은찬이 전국의 의병을 모으자고 권유한다. 선생은 각자 싸우기보 다는 대규모 연합의병부대로 편성하여 통일된 지휘 아래 서울로 진격하여 일거에 일군을 패퇴시키 려는 계획을 수립한다. 1907년 11월 각 의병대장에게 경기도 양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고 13도 창의대진소원수부(13道 倡義大陣所元帥府)를 설치했다. 그리고 모인 의병장들은 만장일치로 이 인영 선생을 총대장에 추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