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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53 일제는 연기우 선생의 뛰어난 전략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징세 수입에도 타격을 받고 있어 특히 주목하고 있었다. 일제의 수배지에 따르면 연기우 선생은 신장은 5척 4촌(약 162cm) 정도로 얼굴 왼 쪽 관자놀이와 왼쪽 팔에 화상을 입었다고 한다. 평범한 조선식 복장에 붉은색 모자를 쓰고 권총과 검을 찼다는 증언도 있다. 일제의 경기 북부 총공세 이후 행적이 묘연 1909년 경기 북부의 의병전쟁은 몇 년간 일제와 격전을 벌인 연기우 선 생과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다 의병 에 투신한 강기동에 의해 주도된다. 두 사람은 군인 경력을 살려 소규모 부대로 유격작전을 벌이거나 연합하 여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면서 일본군 을 공격한다. 1910년 2월에 들어서자 일제는 한일 병합을 추진하고 이에 걸림돌이 되는 경기 북부 의병을 전멸 시키기 위해 총공세를 펼친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의병장들은 만주나 러시아로 이동해 독립군 으로 활동하기로 한다. 이때 강기동 의병장은 이동 중 원산에서 잡히고 만다. 강 기동은 법정에서 임종 직전에 “우리가 연기우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렇게 참패하였노라, 연기우는 3일 천기(天氣)는 보는 사람이라 적을 맞아 패함이 없고 용병술이 신과 같아 서 충국애민하는 지성이 참으로 놀라운데 우리 대한에 연 기우 같은 사람 셋만 있으면 나라를 찾을 수 있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그 후 연기우 대장은 어디로 갔는지 어떤 활동을 했는지 기록이 없다. 1914년 6월 강원도 인제에서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다는 매일신보 기사가 있는데 재판기록이나 처형 기록이 없어 오보일 가능성이 크다. 일제의 기록에서도 그 가 블라디보스토크나 미국으로 망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연기우 의병장 공적비 연기우 의병장 전사 보도기사. 그가 전사했다기에 더 이상의 후속기사는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