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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1907년 광무황제의 양위가 확정되자 서울에서는 대한제국군의 격렬한 반대시위가 일어났고 일제 는 시위를 막는 동시에 한국을 완전히 식민지화하기 위해 대한제국군을 해산하기로 하고 정미7조약 의 부속 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에 관한 비밀각서를 교환한다. 대한제국군 해산으로 의병의 깃발을 세우다 연기우 의병대장이 강화도에서 근무하던 당시에 서울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군이 해산당하자 서울에서는 일본군과 시위대에 의한 교전이 일어 났고 그 소식을 듣고 각지의 수비대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강화진위대의 연기우 선생도 이 소식 을 듣고는 부하를 이끌고 일본군을 공격했다.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면서 강화도를 빠져나온 선생은 임진강 유역과 연천 보개산을 근거 지로 삼아 의병 활동을 펼쳤다. 이 인근은 선생의 고향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리를 잘 알고 있으며 산악이 펼쳐져 있어 전략적으로도 유리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의병장과 는 비교할 수 없는 장기간의 의병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 기사에는 “연기우 대장은 지용을 겸비해 헌병과 교전하여도 패하는 바가 없어 헌병들이 감히 범접지 못하고 민간에 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 인민들의 동요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서울진공작전 실패 후 경기 북부 의병전쟁을 주도하다 1907년 8월 군대 강제해산 이후 대한제국군 출신이 대 거 의병에 참가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크게 올랐다. 당 시 경기 지방 의병의 구심점은 허위와 이인영이었다. 연 기우 선생은 허위 부대와 연합해 더욱 성과를 올렸다. 1908년 1월, 13도창의군이 서울진공작전을 펼칠 때 연 기우 선생은 허위부대의 선봉으로 서울로 진격했다. 하 지만 지원부대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전투 중 부상 을 입고 후퇴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의병진영의 상징적 구심의 이인영이 부 친상을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가고 허위는 항쟁을 계속하 다 1908년 6월에 일제에게 잡혀 교수형을 당하고 만다. 경기도 지방의 의병은 연기우 선생과 이은찬 에 의해 재편되었는데 몇 달 후 이은찬이 일본군에게 잡히면서 중부 지방의 실질적인 의병활동은 연 기우 선생에 의해 주도 된다. 서울 진격작전 모형. 연기우 선생은 13도창의대진소의 대대 장의 직책으로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