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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3.1만세운동
철원지역의 3.1만세운동은 종교인, 학생, 농민등이 주축이 되어 1919년 3월 10일에 강원도 지역 최초로 일어났으며, 이는 들불처럼 번져 갈말면, 김화군, 내문면 등 철원 전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철원에서 만세운동이 일찍 일어났던 배경은 경원선을 통해 경성의 정보가 어디보다 빨랐으며, 천도교인들의 신속한 독립선언서 배포와 민족주의 사상, 그리고 기독교회의 신문화운동및 자유주의 활동과 보금, 구한말 의병전쟁으로 다져진 항일 정신이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일제의 공식적인 문서와 판결문 등에 따르면 철원군의 만세운동은 12회, 약 9,000명, 김화군은 8회, 약 3500명이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일제가 만세운동의 규모를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축소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운동가 박은식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집필자료에 따르면 철원군의 집회인수 규모는 약 70,000명이 참야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3.1만세운동의 성지인 탑골공원 내에 동판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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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면. 철원면은 천도교 교훈 최병훈이 평강 교구장 이태윤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매를 전달받고, 3월 2일에 철원 관내에 배포하였으나 관련자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다만, 천도교인의 독립선언서 배포는 철원 만세운동의 기반을 조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3월 10일 군청 뒷산인 북관산에서 미리 제작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강원도 최초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만세운동은 서문거리, 철원군청, 장날 등 많은 군중이 모이는 곳에서 주로 일어났다. 특히, 군수 오태환, 친일파 방의병의 집에 몰려가 만세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절원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배경은 기독교 사상의 빠른 전파와 천도교의 대중적 기반, 하일 운동의 기초를 닦던 배영학교, 봉명학교, 정의학교(혹은 진정의숙), 그리고 비록 공립학교였지만 근대문화를 익힌 철원농업학교와 보통학교 학생의 역할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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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군
김화군은 채장숙이 평강읍 천도교 교구실에서 독립선언서 150매를 받아 90매는 화천군에 나머지 60매는 김화와 금성지방에 분배하였다. 김화지방은 신동민이 박윤실, 윤규호와 함께 군청,면사무소,헌병주재소 게시판 등에 30매를 배포하였다. 김화군의 만세운동은 구한말 활동한 의병과 상인 주도로 3월 12일, 3월 28일, 29일, 4월 4일에 깁화읍내와 기오면 창도리, 근동면 하소리 등에서 일어났으며, 평화적인 시위뿐만 아니라 일본인 상점, 면사무소, 우편소, 헌병주재소 등을 공격하는 무력항쟁도 하였다. 이는 순전한 민족정기와 일제의 경제적 침투에 항거한 반일 감정에서 일어났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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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말면.
갈말면의 만세운동 중심지는 토성리 지경터이다. 지경터의 반은 갈말면 토성리, 반은 길화면 청양리이며, 3.1만세운동 당시 청양리에 일제의 헌병주재소가 있었다. 갈말면은 문혜리 서당 훈도 신성규와 보성전문학교 학생 김칠룡(후에 일제경찰도 변절)이 주도하여 3월 12일에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문혜리, 군탄리 등 남부 주민은 문혜리 면사무소가 있는 어음재에 집결하고, 토성리, 동막리, 내대리, 도창리 주민은 청양리 주재소가 있는 지경터에 집결하여 만세를 불렀다. 오후 1시경부터 지경터에 있는 주민은 문혜리에 있는 군중과 합류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만세운동을 벌였으며, 이날 참가한 군중의 수는 1천명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