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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칼럼 ➊ • ‘의병의 날’ 단상: 의병 - 독립군 - 광복군 - 국군 창설과정과 그 의미 15 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반 의 병은 양반에서 천 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 규모 도 1593년 당시 관 군의 1/4에 해당하 는 2만 2천 6백여 명에 이르렀다. 신 분을 초월하여 전 백성이 하나가 되어 총력전으로 대응하여 일본 군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로부터 약 300여 년이 지난 1895년 명성 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위정척사사 상을 가진 유생들이 전국에서 봉기하였다(을미 의병). 이들은 단발령을 강행하는 지방관을 처 단하고, 그들을 진압하는 관군 및 일본군과 항 전하였다. 충청도 유성에서는 문석봉, 제천에 서는 유인석, 경기도 남한산성에서는 김하락, 춘천에서는 이소응이, 안의에서는 노응규 등이 진주성을 점령한 후 김해 일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북한의 함흥·해주·의주 지역에서 도 의병이 봉기하였다. 최익현은 을미사변에 분개하는 상소문을 올 렸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우리의 대행황후(명 성황후)께서 갑자기 민망하고 흉한 일을 만나 시니, 팔도의 민중들이 대소할 것 없이 모두 통 곡하며 부르짖으며 맹세코 역적들과 천지 사 이에 같이 살지 않으려고 합니다.…(중략)… 더 욱 십족을 버리고 서더라도 큰 원수를 어찌 갚 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최익현, 『면암집』권4 소 䟽 , 「宣諭大員 命下後, 陳懷待罪䟽 」). 이들 의 병은 전국 각지에서 반침략·반개화 투쟁을 전 개하며 친일 내각과 일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 각지에서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 는 의병이 일어났다(을사의병). 1906년 민종식 이 지휘한 홍주 의병은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 투 끝에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같은 해 6월 태 인에서 봉기한 최익현은 관군에게 체포되어 대 마도까지 끌려가 순국함으로써 의병 봉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해의 신돌석 부대는 동해안 일대에서 유격전술을 펼치며 일제에 항전하였 다. 나철·오기호 등은 1907년 을사5적의 암살 을 시도하였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하 였다. 같은 해 8월 강제 해산된 대한제국군은 의병과 연합하여 대대적인 항일무장투쟁을 벌 였다(정미의병). 서울 시위대의 남대문전투로 경남 의령군이 2011년 3월 건립한 의병광장에 설치된 ‘홍의장군’ 곽재 우 동상(연합뉴스 제공) 영국 ‘데일리 메일(Daily Mail)’ 종군기자로 한국에 왔던 맥켄지 (Frederick A. Mackenzie)가 1907년 11월 8일 경기도 양평(오 빈리 일대)에서 촬영한 의병의 모습(The tragedy of Korea 수 록, 인사이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