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page

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47 9월 7일 선생의 의병부대는 6백여 명의 병력을 2개 부대로 나누어 홍천읍을 습격하는 한편 일본군 창고 등 군용 시설물들을 소각시켰다. 9월 23일에는 횡성 갑천에 있는 봉복사부근에서 일본군과 전 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리는 등 지속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해 큰 성과를 거뒀다. 치악산 강림 전투에서 순국 1907년 12월 이인영, 허위, 이강년 등이 중심이 되어 13도창의군을 결성했고, 해산 군인들을 중심 으로 조직되어 전투력과 화력이 가장 탁월한 부대를 이끌고 민긍호 선생도 참가했다. 1908년 1월 13 도창의군이 곧 바로 서울 진공작전을 수행하자 선생의 의병부대는 경기도 가평을 거쳐 서울 근교까 지 진출하여 지원했다. 하지만 전투 중 총 36회의 전투로 탄환이 소진되고 전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더 이상의 희생을 막 기 위해, 총대장인 이인영이 모든 책임을 안고 부친상을 이유로 귀향하자 서울진공작전은 좌절되었 고 1908년 1월 28일 선생의 의병부대는 본래의 활동 지역인 강원도로 돌아왔다. 1908년 2월 27일 선생이 직접 지휘하는 의병부대는 원주의 강림 박달치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 대와 치열한 전투 끝에 이를 격퇴했지만, 다음날 충주에서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의 공격으 로 민긍호 선생은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머지 병사들은 그날 밤 선생을 구출하기 위하여 다시 일본군 숙영지를 공격했다. 다급해진 일본군은 악랄하게도 민긍호 선생을 그 자리에서 사살 하고 말았다. 일제의 군대해산 조치에 반대하여 1907년 8월 5일 봉기한 선생은 항일 무장투쟁을 통한 국권회복의 길을 개척하다 1908년 2월 29일 일본군에 의해 피살, 순국 했다. 항일 무장투쟁을 통한 국권회복의 길을 개척하다 순국한 민긍호 의병 장의 묘소 및 민긍호 의병장 기념 동상(사진 우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