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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었다. 원주진위대의 대대장 홍유형이 군부의 전보 명령을 받아 상경 길에 오르자 해산명령을 받으러 가는 것으로 판단해 병사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봉기 준비에 착수했다. 군대해산에 항거하여 의병부대 조직 민긍호 선생은 대대장 홍유형의 지휘 아래 서울로 진격할 것을 구상하고 상경 길에 있던 그를 본대로 데려와 부대를 지휘하여 서울로 진군할 것을 요구했 다. 홍유형이 도망하자 자신이 원주진위대 병사들 을 지휘해 봉기하기로 하고 거사일을 원주읍 장날로 정했다. 8월 5일, 민긍호 선생은 비상 나팔을 불게 하여 장 병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나라에 병사가 없으면 무엇 으로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군대를 해산하라는 명령 에 복종할 수 없다”고 하면서 무장 봉기를 선언했다. 무기고를 열어 병사들은 물론 봉기에 호응한 일반 민중들에게 총기와 탄약을 분배해 의병부대를 편성했다. 우선 우편취급소, 군아, 경찰분견소 등을 습격해 원주읍을 완전히 장악하고 군수물자를 조달했다. 원주읍을 점령하기 위해 급파된 일본군 충주수비대 부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여 십여 명의 적군을 사살함으로써 그들을 격퇴했다. 원주진위대의 봉기 사실을 보고받은 일본군 사령부는 긴급히 진압 부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지형을 잘 아는 주민들의 후원으로 일본군을 저지하였다. 백여 회의 유격전으로 상당한 전과를 올리다 민긍호 선생은 전략적 차원에서 의병부대를 소부대로 나누어 편성한 뒤, 일본군과의 유격전을 전 개하도록 했다. 과거 원주진위대의 관할 지역을 중심으로 신출귀몰하게 일본군을 공격해 큰 성과를 올렸다. 특히 선생의 의병부대는 해산 군인들이 중심이 된 부대로 화력과 전투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활동지역이 과거 이들의 관할 지역이었기 때문에 지형지물에 익숙하여 70여 차례 일본군과 의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일본군 사령부는 대전, 수원 주둔 일본군 수비대와 서울 주둔 일본군을 증파하여 민긍호 선생의 의병부대를 진압하도록 했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이강년 의병부대와 함께 8월 23일 충주를 양방향 에서 협공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줬으나 충주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강원도 관찰사 황철이 당시 횡성군수를 통해 전달한 귀순 요청에 대한 민긍호 의병장의 2차 답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