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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43 박처사라는 병법 전문가를 만나 항일전에 필요한 전술, 전략을 익혔다고 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1월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전국적으로 을사늑약 반대투쟁이 불길처럼 번져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최익현이 이끌었던 태인의병과 민 종식이 주도한 홍주의병이 일어난 것도 이 무렵이다. 을사늑약의 비보를 들은 선생은 금강산을 떠나 서울을 거쳐 호서지방을 돌아 고향으로 내려왔다. 항일의 거두인 면암 최익현을 만나 구국의 방책을 논의한 것도 이 무렵으로 전해진다. 항일전의 선봉에 서다 1906년 봄, 문태수 선생은 덕유산 일대에서 동지들을 모으고 포수를 규합하여 덕유산 영각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곳에서 전열을 정비한 후 곧 원통사로 이동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항일전에 들어갔다. 1906년 9월, 박춘실(본명 박동식)이 거느린 부대와 규합해 의진의 전력을 증강한 선생은 9월 하순 장수로 들어가 그곳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여 이들을 전멸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이 전투 후 근거지를 무주 구천동의 덕유산으로 이동했고 1907년에 들어 선생은 구천동의 근거지 를 신탁광에게 맡긴 뒤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무주군 부남면에 주둔했다. 이때 선생의 의병을 탄압하 기 위해 일본군이 출동하자 기습하기에 유리한 고창곡에 매복한 후 일본군을 이곳으로 유인하여 기 습하였다. 일본군 전사자만 43명에 달할 정도였다. 수차의 항일전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자 선생의 명성은 전국으로 퍼졌다. 이에 따라 선생의 휘하에 지원해온 자가 2백 명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서울 진공 작전에 참가하다 1907년 하반기는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올랐지만, 의병들은 전국 각지에서 각각 활동 하고 있었다. 이에 중부지방에서 활동하던 허위, 이인영, 이은찬 등 의병 지도자는 전국의병을 규합 하여 서울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호남을 주 무대로 영남, 호서 일대에 걸쳐 활동하며 명성이 자자하던 선생에게도 연합부대 결성에 동참해 달라는 격문이 도착했다. 문태수 선생은 즉시 이에 호응해 정예병 100여 명을 선발해 이들을 거느리고 집결지인 양주로 향했다. 이동거리가 멀어 소수의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참가했던 것이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13도창의대진소를 구성했다. 하지만 사전에 정보가 노출된 상태였고 지휘 계통을 세우기 어려워 허위가 거느리는 3백 명의 별동대는 1908년 1월 말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공격했지만, 결국 전력의 열세로 패퇴하고 말았다. 서울진공작전에서 쓰라린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