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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41 한국군 시위대의 저항이 예상외로 맹렬하다는 보고를 받은 일본군 제13사단장은 보병 제51연대 제 3대대장 사카베(坂部義男) 소좌에게 남대문 병영에 있는 2중대와 기관총 3문으로 남대문 수비병 및 소의문 수비병과 협력하여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병사들의 항쟁을 속히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이후의 전투상황은 더욱 치열해졌다. 양측이 맞붙어 전투를 벌일 때, 오오타(太田) 공병소위는 수 류탄을 영내에 던져 다수의 시위대 병사들을 전사시켰다. 이 틈을 노려 일본군 제12중대 또한 영내 에 돌입함으로써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시위대 병사들은 영내로 침투한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일본군이 병영을 넘어들어오자 남상덕 참위는 칼을 빼 들고 크게 소리치며 앞장서 대항했다. 러일전쟁 중 여러 차례 용맹을 떨쳐 도깨비대장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던 가지하라 대위가 이때 시위대에게 사살됐다. 하지만 남상덕 참위도 일본군의 총탄을 맞아 27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 게 전사했다. 시위대는 중과부적으로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밖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정미 의병의 도화선이 된 남대문 전투 병영을 탈출한 다수의 시위대 병사들은 민가로 숨어 들어갔고, 일부는 계속 일본군 남대문 수비병들을 공 격함으로써 항쟁 의지를 불태웠다. 이날 전투의 한국 군 시위대의 피해는, 전사자가 장교 11명, 준사관과 하 사 57명, 부상자 100명, 포로 516명이었다. 탈출한 시 위대는 500명 이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영국의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신문기자 멕켄지 (mackenzie)는 이날의 전투에 대해 “그들의 용감한 방 어는 심지어 적군도 높이 찬양하였다고 하면서, 적어 도 며칠 동안은 일인들은 그들이 이전에 말해온 이상 으로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은 주목할만한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송상도의 「기려수필」에서는 “당일의 서울 시가전 이 후 나머지 군인들은 각자 흩어져 정미(丁未)의 팔로(八 路) 의병으로서 다시 일어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1881 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대한제국군으로 복무했던 남 상덕 참위가 주도한 남대문 전투는 대한제국을 지키는 마지막 불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르 프티 주르날>에 실린 태극기와 '남대문 전투'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