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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 대통령장│김하락(金河洛) “우리 오백 년, 예의의 나라가 개나 양같은 섬나라 오랑캐에게 먹힌단 말인가 아! 우리 민족은 과연 이 참화 를 면치 못할 것인가 내가 차라리 어복(魚腹)에 장사(葬事)할지라도 도적놈들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 - 김하락 선생이 총상을 입고 강물 속으로 투신 자결하기 전 남긴 말 국가적 위기를 구하기 위해 일으킨 이천수창의소 김하락 선생은 1846년 12월 14일 경상북도 의성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후 서울로 이주한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며 천문, 지리, 병법, 의학 등의 서적을 널리 탐독했다. 김하락 선생이 역사의 전면에 나오게 된 시기는 1895년이다. 1895년에 명성황후의 살해 사건이 있 었고 그 다음 달에는 단발령이 내려저 전국에서 큰 항의가 일어났다. 이는 밖으로 개혁의 모양새를 갖춘 것이지만 실제로는 반식민지 체제로 개편하려는 일제의 침략 책동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적 수모와 국가적 위기가 닥치자 김하락 선생은 왜적을 몰아내고자 결심했다. 평소 의기투합하 였던 이종 동생 조성학과 구연영, 김태원, 신용희 등과 경기도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1895년 11월 17일 이천에 도착한 선생은 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화포군(火砲軍) 도영장 방춘식과 협 의하여 포군 100여 명을 선발한 뒤 동료들을 각지로 파견해 각 군 소속 포군들을 의병으로 모집했 다. 그리고 안성에서 창의한 민승천 의병진과 합세해 1896년 1월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라는 연합의진을 꾸렸다. 삶의 마지막 1년을 항일투쟁으로 불사른 의병장 명성황후 살해 사건이라는 민족적 수모를 겪은 이후 국가적 위기가 닥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림. ● 1846년 12월 14일 경상북도 의성 출생 ● 1896년 연합의진 이천수창의소 구성 백현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 대파 남한산성 점거 후 서울진공계획 수립 이후 비봉산 전투, 경주성 전투에서 승리 ● 1896년 7월 14일 강물에 투신,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핵심공적 주요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