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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는 만주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 서로군정서, 대한통의부, 참의부 등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지사는 재만주 한인사회에 교회와 여성교육회 등을 설립 조직하여 항일근거지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이면서 한민족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가 하면 여성으로서 독립전쟁에 참여하여 부상병을 간호하는 일도 하였다. 또한 지사는 1925년 4월에 서울로 잠입하여 齋藤實(재등실: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8년에는 길림성에서 안창호의 석방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31년 김동삼이 신의주감옥으로 이송될 때에는 구출을 시도하였고 국제연맹 조사단의 릿톤경이 만주에 오자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독립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계의 분열을 보고 통탄한 나머지 혈서로써 단합을 호소한 적도 있었다. 1933년 3월 1일은 일제가 중국 동북지역을 강점하고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운 1주년 기념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지사는 이때 만주 강점의 최고 원흉인 전권대사 武藤信義(무등신의:무토 노부요시)의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같은 해 2월 27일 하얼빈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자사는 일본 경찰의 악독한 취조와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을 혼자 꾸민 것이라고 주장하여 같이 체포된 두 동지가 석방되게끔 하였다. 투옥된 지사는 15일간 단식투쟁하면서 일본사람만 보면 호통을 치고 매도를 하며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결국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첫째 가지고 있던 돈 200원을 조선이 독립되는 날 축하금으로 바치라. 둘째 손자 시련을 대학까지 공부시켜 내 뜻을 알게 하라. 셋째 남은 돈 49원의 절반은 손자가 공부하는데 쓰고 나머지는 반은 친정의 종손자에게 주어라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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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국제연맹조사단에게 보냈던 자신의 손가락을 아들 성삼에게 내어주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다 순국하였으니 때는 1933년 8월 22일 당년 61세의 나이였다. 지사의 유해는 하얼빈 남강 외국인묘지에 안치되었다. 후손들은 지사의 유언에 따라 독립축하금을 1947년 서울운동장에서 김구 선생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3월 1일 남자현 지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명하노니
연약한 여아로 태어났으나 그 기백은 이미 장부였고 짧았던 부부 사랑을 조국 사랑으로 극복하였네. 이역만리 만주 땅에다 항일 터전 마련하고 독립투쟁, 여성계몽 가리는 것 없었으니 그 지칠 줄 모르던 구국의 혼 민족과 함께 살아 숨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