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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층을 중심으로 자주의식이 형성, 일제 통치에 저항하여 항일의병활동을 펼치다.
평민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장군은 19세의 나이로 1896 갑으의병 일으키고 을사의병, 정미의병등에 참가
1806 대표적인 평민 의병장 신돌석 장군
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영릉의병장 장산 신돌석 장군은 1878년 11월 3일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속칭 복디미)에서 부친 신석주와 모친 분성김씨 사이에 2남 2녀중 첫째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평산이며 본명은 태호이다.
평민(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항일의식이 남달랐고, 애국 애족하는 마음이 매우 강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국의 운명이 위급해지자 무력으로 적과 싸울것을 결심하고 1906년 영해를 중심으로 영릉의병진을 창의하여 동해안및 태백산맥을 거점으로 일본군과 맞서 신출귀몰한 활약으로 일본군에게 크게 피해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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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은 의병활동을 통해 주로 영해, 영양, 진보, 봉화, 울진, 삼척, 평해, 경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관아와 일본인 집단거주지 그리고 일본인들이 조선의 농수산물을 약탈해 가기위해 침입한 선박 등에 집중적으로 공격을 가했으며 의병의 공격으로 우편취급소, 경찰관서, 일본인거주지 등에 불에타고 파괴되어 일본의 조선침략을 위한 주요 시설들이 붕괴됐다. 또한 영천을 근거지로 창의한 산남의진과 일본군을 축출하기 위한 연합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장군의 활약이 전국에 그 명성이 알려지자 1907년 음력 11월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의 의병장들이 모여 13도 창의대진소를 결성할 때 장군은 교남창의 대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8년 8월 중순이후 일본군 수비대가 계속 증원되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신돌석장군 의병토벌대가 결성되어 압박을 가해옴에 따라 점차 그 활동이 위축되고 결국은 장군의 의병해산명렬을 받은 의병들이 자진해산 혹은 투항하였고 장군은 만주로 건너가 새로운 항일투쟁을 계획하려 했으나 1908년 12월 12일 현상금을 탐밴 주민에 의해 살해되어 불과 30세의 짧은 나이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