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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신간회 당진지회는 1927년 12월 6일 창립하여 1931년 3월 해소할 때까지 만 3년 4개월간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활동 과정을 설립기(1927년), 활동기(1928~1930년), 해소기(1931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설립기의 운영진은 홍종관을 회장으로 삼아 20여 명의 운동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 면 지역을 대표하였고, 천도교와 개신교를 신앙으로 하는 운동가들이 많았다. 정환석은 당진 천도교의 핵심 인물이었고, 심종관과 정형택도 감리회 소속 인물이었다. 또한 회원 가운데 동아일보 당진지국과 조선일보 당진지국의 기자들도 있었다. 신문 지국의 기자들은 당진 지역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활동기의 운영진은 설립기와 비슷한 체제로 유지되었지만, 1929년경에 이르면 홍종관 회장 대신 송병혁 집행위원장이 주도하느 체제로 바뀌었다. 또한 설립기보다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특히 당진지역 혁신 청년 단체인 신합청년회 회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 가운데 배기영과 인원수가 대표적이다. 설립기의 보수적 성향에서 점차 개혁적 성향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헤소기의 운영진은 정형택 집행위원장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 활동기와 비슷한 운영진이다. 정형택은 합덕을 중심으로 지역사회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던 인물이다. 해소기에는 설립기에 활동하였던 천도교 계열의 실력양석 운동가들이 정환석을 제외하고 거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신간회 당진지회의 운영진이 후기로 갈수록 더욱 급진적인 성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때 활약한 임종만, 정학원은 대표적인 사회주의 사상자였다. 신간회 당진지회의 주요 활동으로 첫째, 재만 동포의 권익 옹호를 위해 노력한다. 둘쩨, 당진 주민 경제의 궁핍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면서 곡창 지대인 당진지역 주민들에게 많은 통제를 가하였다. 주민들은 곤궁한 삶 속에서도 미곡증산을 위해 동원되었다. 하지만 증산된 미곡은 농민에게 주어주지 않았고 대부분 수탈되었다. 섯째, 우리 주민의 일상에 대한 불이익을 개선하도록 주장하였다. 그것은 조선어 교육의 확대와 문맹 퇴치 문제, 언론출판 집회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당진지회의 활동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신간회의 각종 집회는 일제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제한적인 활동허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신간회 당진지회는 일제 경찰의 억압 속에서 제한적ㅇ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지만, 1920년대 말 당진지역 민족 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또한 개별적이고 은밀하게 전개되었던 항일 운동을 조직화하였다. 특히 당진지역에 만연했던 소작쟁의를 체계적으로 펼쳐 나감으로써 식민지 지배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은 나아가 해방직후 당진지역 정치세력의 근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