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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칼럼 • 6·3사태 60주년에 그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한다 13 어놓기에 충분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용기 있 게 설정한 평화선을 일본의 요구에 따라 철폐 하기로 했다는 박 정권의 발표는 더욱 큰 반발 을 불러일으켰다. ‘굴욕외교반대투쟁’에 1964년 6월 3일 비상 계엄령 선포, 한일협정 졸속 추진 1964년이면 해방으로부터 20년이 채 안 된 때였 다. 선열의 가열했던 애국투쟁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던 시점에, 일제 에 협력했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룬 박정희 정부가 전범(戰犯)들이 살아남아 정치와 정부를 이끄는 일본 을 상대로 굴욕적인 협상을 벌인다는 것 자체를 받 아들이기 어려웠다. 여기서 바로 ‘굴욕외교반대투쟁’이 3월 24일에 서 울대학교에서 시작되었다. 문리대에서는 김중태·현 승일·김도현 등 정치학과의 세 학우와 사회학과의 김덕룡 학우가, 법대에서는 정정길 학우가 앞장을 섰다. 또 문리대에서는 송철원·김정남·성유보·김문 원 등 정치학과 학우가 뒤따라 시위를 이끌어 모두 「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교도소를 다 녀와야 했다. 말하자면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참여했 던 것이다. 정치학과의 송진혁 학우가 경찰의 곤봉 을 맞아 피를 흘리는 장면은 사진과 함께 외신을 타 고 전파되어 국제여론을 크게자극했다. 서울대학교가 불을 붙인 반대투쟁이 거의 동시에 전국의 모든 대학교로 전파되고 고려대학교에서는 이명박 군이 주도해 구속되었다. 제2공화국 윤보선 대통령의 주도 아래 야당과 그리고 『동아일보』 · 『조선 일보』를 비롯한 비판언론이 가세하면서 마침내 ‘박 정권퇴진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궁지에 몰린 박 정 권의 대응은 6월 3일에 비상계엄령 선포로 나타났 고, 곧바로 대규모 체포와 투옥이 뒤따랐다. 지도부 의 학생들은 윤 대통령의 비교적 넓은 안국동 사저 를 피난처로 삼았고, 일부는 윤 대통령과 부인 공덕 귀 여사의 보살핌을 받으며 거기서 생활하기도 했 다. 이 지도부가 훗날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에서 주축을 형성하고, 이명박 군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에 이른다. 박 정권은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주축으로 하는 계엄체제로, 그리고 학생시위의 배후에 북한의 ‘남조 선해방전략’을 추종한 반국가단체가 있었다는 중앙 정보부의 조작된 사건 발표로 겨우 위기를 넘겼다. 그 래도 반대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박 정권은 이듬해 6월에 겨우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6·3사태는 우리 국민이 민족정기를 잃지 않았으 며 비합헌정부의 비밀외교에 동의하지 않고 있었음 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결국 외교는 민주주의와 함 께 가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강대국들 사이의 경 쟁과 갈등이 깊어지는 오늘날 그들 사이에 끼어있는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민족정기를 여전히 지키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가운데 효율적 외교 를 펼쳐야 할 것이다. 1943년 중국 심양에서 태어났다. 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임 중이다. 필자 김학준